박호빈은 자신의 색깔이 선명한 안무가이다. 독립무용가로 활동하면서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이순(耳順)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열정은 여전하며 외적으로도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젊다. 변한 것이 있다면 깊어지고 여유로워진 삶에 대한 태도이며 이는 춤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한국에서 모던 댄스에서 컨템포러리 댄스로 이행되는 시기를 함께 한 그는 동시대성을 담은 주제를 움직임으로 표출하며 춤과 함께 해왔다. 또한 표현적이면서도 피지컬한 독특한 스타일로 해외에서도 인정받으며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연극에서 춤으로의 방향 전환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의류제조사업을 하였는데, 음악선생님으로 피아노와 만돌린을 연주하셨고 일본에서 드라이플라워와 자수 디자인을 공부해서 전시회도 열었다. 당시로는 상당히 모던하고 아방가르드 했다. 후에 자신의 예술적 기질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박호빈의 풍부한 표현력은 연극적 기반에 있다. 서울예대 연극과에 연기 전공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전통 가면극 ‘봉산탈춤’을 접했고, 타 과의 성우수업을 수강하던 중 우연히 배우에게 있어 신체훈련을 중요시하던 은사 유인형 교수에게 현대무용 수업을 권유받았다. 그래서 배우게 된 것이 타계한 김기인 교수의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과 그녀의 스스로춤 메소드였다. 나중에 김기인 안무 <틈터틀> 작품의 모태가 된 무용과 졸업 작품에 참여하면서 박호빈의 춤의 길은 시작되었다. 이때 그는 무대에서의 묘한 엑스터시가 무의식적으로 생성됨을 느꼈다.
졸업 후, 최불암 선생이 대표로 있는 현대앙상블 극장에 아카데믹 정신이 살아있는 이병훈 선생이 상임 연출로 활동함에 이곳에 입단했다. 곧바로 군부대 방위병으로 입소하게 되면서 보직이 경계병이라 야간근무 시에 시간을 활용해 컨템포러리무용단에서 활동했던 배혜령 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제대하자마자 배혜령 선생의 추천으로 박인숙 안무작 <풍향계>로 대한민국무용제에 참석하게 되면서 무용계에 공식 입문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제대 후, 돌아온 현대앙상블 극장이 폐쇄되면서 자연스레 극단도 1년 만에 해체되어 본의 아니게 프리랜서로 한 동안 연극과 무용을 병행하게 된다.
영혼의 스승들
그가 현대무용 안무가로 입문하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분은 강송원이었다. 그와의 첫 작업은 <만월>이었고, 이 작업을 통해서 박호빈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로 유입되었다. 당시의 즉흥 연습은 훗날, 박호빈이 나름대로 변증시키고 새롭게 고안해낼 수 있는 안무법의 토대가 되었다. 이 때 같이 작업에 참여한 무용수 중 한 사람이 조성주였는데, 훗날 댄스컴퍼니 조박의 창단 동인이자 공동대표였고 한 때는 부부였다. 상당히 명석했고 안무가적 자질도 뛰어났다. 행정능력도 뛰어나 배운 것도 많았다.
박호빈에게 뜨거운 영혼의 세계를 보여준 스승은 강만홍이었다. 학창시절, 움직임 수업 때 강만홍 선생이 인도 뉴델리 스리람 바라티야 칼라 켄드라(Shriram Bhatatiya Kala Kendra)에서 차우(Chau)춤을 배운 것을 자신이 변형한 바람춤, 구름춤 등을 선보이는 순간, 그는 숨이 멎을 듯 했다. 그로부터 4-5년 후, 1990년 강만홍 선생의 귀국공연 <숨 4323>을 지금은 사라진 바탕골소극장에서 선보였고, 강만홍 선생과의 작업을 위하여 박호빈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와의 두 번째 작업은 지금은 사라진 충돌극장에서 장기공연을 올린 <그대 거기 왕관을 쓰고 있어도>였다. 두 번의 작업을 통해서 얻은 그의 움직임 메소드는 박호빈의 춤 작업에 밑바탕이 되었다. 에너지의 밀도와 빌드업(build-up), 그리고 신성체험이었다.
이 작업들을 같이 해온 4인방(박호빈, 심규만, 이상희, 이재환)이 있었다. 심규만은 맏형으로 누구보다도 강만홍과 긴 시간을 보냈고 창무회 강미리, 동덕 메드인댄스 컴퍼니 이연수 작업에 절대적인 연출로 정평이 나 있지만 철저히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둔형이었다. 이상희는 엄청 에너제틱한 배우였고, 연출력도 갖춘 배우형 연출이었다. 이재환은 주로 한국 창작무용계의 연출과 대본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댄스씨어터 까두와도 <어린왕자>, <야만 샤만>의 대본작업을 함께 했다.
춤의 자양분이 되었던 연극작업
박호빈이 프리랜서가 된 이후의 연극작업은 유니크한 것들이었다. 오경숙 연출의 7시간 그리스 비극이라든지 강만홍과의 움직임과 소리로 구성된 전위연극이 대표적이다. 본격적으로 무용으로 전향한 후에는 주로 연극과 창작뮤지컬에 필요한 안무작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연극을 이해하는 덕에 연출과의 소통이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극단 미추 손진책, 극단 학전 김민기, 극단 반 박장렬, 극단 물리 한태숙, 고선웅, 김광보, 양정웅, 전훈, 오경택, 김태웅, 구경환과 작업했으면 근래에도 지속적으로 접하는 연출은 김아라, 나진환, 박장렬 등이 있다. 무용은 지금은 출가한 강송원 선생이 이끌던 푸리 창단멤버, 홍승엽 선생이 이끌던 댄스씨어터 온 창단멤버였고 창무회, 컨템포러리 팀과 자주 공연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인물분석과 다양한 형식을 쏟아내는 구성방식, 상징성이었다. 인물분석은 그를 심리학에 눈 뜨게 했고, 심리학은 결국 신화의 세계로 인도했다. 신화는 결국, 현재의 세계관이나 우주관의 기점을 만들어 주며 작품 구석구석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다소 난해할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구성방식의 변화는 자유로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게 해주었고 단편적인 서사의 구조를 넘어 시공간 자체가 하나의 원대한 서사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으로 해외진출을 이루다
그는 1994년 <시인의 죽음>으로 문예진흥원에서 주최한 제2회 신세대 신작무대에서 우수 안무가로 선정되어 프랑스에서 연수 기회를 가졌다. 그 후 파리에서 솔로 작품을 안무해 그리스와 프랑스에서 호평을 받으며 싱가포르, 일본 등지에서 꾸준히 초청공연도 갖게 되었다. 안무활동 이외에도 예술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1996년 서울로 돌아와 춤의 대중화를 위한 소극장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98년 미국 4개 도시 순회공연과 더불어 <워싱턴포스트>지에서 호평과 관심을 모았던 듀엣 작품 <녹색전갈의 비밀>, ‘평론가가 뽑은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에서 <오르페우스 신드롬>을 선보이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99년 박호빈은 삼성문화재단이 가능성 있는 인재발굴 및 육성을 위해 마련한 ‘제4기 MAMPIST 프로그램’의 안무과정에 선발, 보다 체계적인 방법론을 구축하고자 유럽으로 연수를 떠났다. 연수 후 2002년 <꼬리를 문 물고기>, 2003년 <천적 증후군>을 안무하며 타 장르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총체적인 개념의 공연팀을 구상했다. 2004년 LG아트센터 기획공연으로 마련된 ‘한국 무용계를 이끄는 4인의 안무가’에 초청되어 <돌아온 퍼즐속의 기억>을 선보였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공식초청공연과 독일 4개 도시 순회공연으로 <돌아온 퍼즐속의 기억>, <천적증후군>을 유럽무대에 선보이며 뜨거운 반응과 함께 더욱 활발해진 해외진출을 전개했다.
댄스시어터 까두의 창단
2002년 전후로 박호빈은 새로운 인식의 전환기를 맞는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교토아트페스티벌 예술감독과 모노크롬 서커스(Monochrome Circus) 안무가로 활동하던 코세이 사카모토(Kosei Sakamoto)의 초청으로 <생각하는 새>를 공연하면서였다. 이 인연으로 약 3년간은 매해 초청되었고,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협업작업도 수행했다. 그러던 중 교토 지역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아뜰리에 프로그램을 참관했고, 특히 ‘덤프타입(Dump Type)’이라는 미디어 아트그룹의 움직임 리서치 방법이 인상 깊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은 2대의 프로젝션과 1대의 캠코더, 그리고 노트북과 그래픽 패드가 전부였다. 유럽연수기간 동안 런던 라반센터(Laban Center)에서 배운 무브먼트 리서치는 아날로그 방식인데 비해 이들은 소니(Sony)의 나라답게 디지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박호빈의 가치관은 변했다. 그 전에는 자연관에 입각하여 가급적 과학숭배나 자본숭배에 따른 결과물을 멀리했다면 이후부터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처럼 기계와 친숙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멀티미디어 댄스그룹 댄스씨어터 까두였다. 그는 그 전에도 총체적인 공연형태를 추구했지만 창단 이후로는 더욱 그 경향을 확고히 하며 나름의 창작시스템을 구축했다. 특히 영상작업을 하는 최종범 작가에 대한 신뢰는 상당해 거의 모든 작업을 그와 함께 했다. 박호빈은 미래에는 영상 미디어가 우리의 모든 생활을 압권하고, 그 중에서도 홀로그램방식이 구현될 것을 기대했다. 댄스씨어터 까두는 이런 세계관의 변화를 예측하고 단계적 성장을 꿈꿨던 공동창작집단이었다. 2007년에는 고양아람누리 개관기념 공연 <엘리베이터 살인사건>으로 멀티미디어 댄스그룹으로 다시금 인정을 받았고, 2008년에는 작품으로 춤평론가들에게 지지를 받는 등 전문무용단체로서의 위상을 높여갔다.
춤 외의 다양한 활동들
그는 다양한 작업을 통해 외부활동을 해왔다. 순수분야는 연극 외에 창작뮤지컬, 오페라, 창극, 행사 공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커머셜 광고 작업에도 참여했다. 특히, 상업적인 행사를 할 때에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냉혹한 이 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워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오페라나 뮤지컬은 제작 규모가 큰 만큼 그 제작시스템에 배울 것이 많았다. 때문에 댄스씨어터 까두 만큼은 가장 완벽한 제작 시스템을 갖춘 무용단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밖에 비공식 프로젝트로는 ‘인터뷰 여행 중장기 프로젝트’, ‘하늘 쳐다보기 프로젝트’, 그리고 최근 가장 핫한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맘으로 야산에서 명산까지 산이란 산은 몽땅 뒤지기 프로젝트’를 장기간 지속해 오고 있다.
무용에 대한 성찰
박호빈은 춤 자체로서의 무용과 작품으로서의 무용을 달리 생각했다. 음식에 비유해 춤은 한 인간의 퇴적된 시간과 그 시간이 빚어낸 화학물이고, 스스로 진화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레시피가 사라진 진 맛 그 자체라 보았다. 하지만 작품으로서의 무용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셰프의 생각이 들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며 이미 맛을 볼 손님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트렌디한 변모를 가져갈 수밖에 없다. 그는 예술을 하기 전에 예술가가 먼저 되려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 관객의 존재를 등한시 했다고 보았고, 철학은 해석되어지는 여지일 뿐, 관객이 흥미(시선과 호흡)를 가지지 못한다면 전공서적에 불과할 뿐이라 생각한다.
그가 프랑스에서 좋아하는 도시 중에 하나가 몽펠리에인데, 여름이면 댄스페스티벌로 유명하다. 그곳에서는 트리샤 브라운에서부터 근래에 떠오르는 개념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가치가 있는 공연들이 망라된다. 이면을 보면 여러 해 같은 구조로 가는데, 그만큼 다양한 연령층과 취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트렌디함만 앞세우거나 컨템포러리를 혹 진보의 전유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고를 남긴다. 그는 예술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의 탐색일 뿐이며 다양성은 바로 이런 편견으로부터의 성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주요 작품들로 풍부해지다
박호빈의 공식적인 안무입문 작품인 <시인의 죽음>은 그에게 무척 소중했다. 작품내용이나 작품평을 떠나서 작품을 만들어 갔던 과정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는 늘 이 작품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닌 만들어진”이라는 수동적인 표현을 붙인다. 왜냐하면 작업과정을 상기하면 그는 그저 떠오르는 영감들을 정리한 대리인에 불과할 정도로 매순간이 작품에 대한 몰두와 몰입이었고, 삼위일체 되는 가장 큰 엑스터시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산을 타는 행위는 그의 안무과정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행동 중에 하나였다. 그에게 영적, 정신적 영향을 준 세분의 스승을 통해서 산을 접했다. 김기인은 피지컬하고 산타는 그 자체를 훈련의 연장으로 보았고 강만홍과는 연습 자체를 산속에서 흙과 돌들과 어울렸고 강송원과는 유유자적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즐겨했다.
대표작은 ‘댄스컴퍼니 조박’ 때 안무 한 <녹색전갈의 비밀>이다. 젊은 시절, 등판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전율을 느끼게 했던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 전갈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소설은 전갈을 통한 거미류의 생태적 교미 특징을 단순 나열한 것 같지만 그는 관계변화의 문학적, 철학적 질문이 왠지 인간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다. 1998년 민족춤제전의 주제 <여성, 모성을 위하여>에 맞춰 선보였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자기 몸을 희생해 번식을 하는 전갈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특별히 교미 후에 종족의 번식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암컷의 먹이로 내놓는 전갈을 통해 고독한 모성을 그려나갔다. 1999년 미국 4개 도시 순회공연 중 워싱턴포스트는 “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춤으로 된 시에 가까웠다”고 했고,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는 “이질적인 신비로움과 놀라움을 갖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엘리베이터 살인사건>이다. 2007년 고양아람누리 극장이 개관되면서 새라새 극장에서 초청공연을 가졌는데, 극장 탐사 중 벽면 정중앙에 장치 반입하는 상하로 열리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를 무대장치로 그대로 활용했고, 그래서 완성된 것이 미스터리 추리극 형식의 <엘리베이터 살인사건>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느끼는 모종의 불안 내지, 깊은 고독감, 심리불안증을 다뤘다. 이 작품은 이러한 소통의 부자유스러움을 극단의 상황을 전개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고립감의 위험을 이야기했다. 작품은 2008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2009년 인도 아딸깔라리 비엔날레(Attakkalari Biennal)에 초청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특히, 인도에서는 오랫동안 회자되어 그 다음 해부터 아딸깔라리 컴퍼니와 신작 협업을 진행했었고, 2017년에는 인도 젊은 안무가를 위한 멘토로서 초청받아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움직임과 연출상의 특성, 그리고 변화의 과정
댄스컴퍼니 조박과 댄스씨어터 까두 시절 그의 화두는 쇼크였다. 편협한 아름다움이란 미학적 관점을 깨부수는 것이 연출적 의도로서 작용했기에 세련된 움직임보다는 거칠고 투박할 정도로 피지컬하게 움직이는 것을 무용수들에게 요구했다.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무대 효과는 전략적 사용이 핵심이다. 단순한 물량공세를 피하며 적절한, 극적효과를 내는 시점을 연출적으로 계산한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관객의 호흡을 뺏는 시간 디자인에 공들인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 지루함과 싸움을 시키는 루즈함,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공세에 따라 원하는 연출적 포인트를 구사한다.
그가 제로포인트모션으로 오면서부터는 몸에 대한 집중이 화두로 변화되었다. 그 동안 안무와 무용수를 별개로 놓았기에 그간 무대 위에서의 그의 춤은 막간적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팀으로 바뀐 다음에는 제작여건이 안 좋아 스스로 무대를 책임질 일이 많아지면서 좀 더 자신의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오히려 나이 들어감에 있어서 춤의 본질과 만나는 중요한 시점을 맞이한 것이다.
전체성 회복을 바탕으로 한 주제선정과 춤에 대한 태도
박호빈은 이슈선점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따라서 그 동안 내용적으로 앞서 감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형식도 그 만큼 앞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주제를 다루던 구스타프 융이 역설한 전체성 회복을 내포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샤먼으로서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현대인의 행위, 행동 구석구석에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시각으로, 이를 통해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고 모든 것을 관찰했다. 철학적이고 구도자적인 자세와 태도는 그의 작품 전반에 투영되어 있고, 반대로 움직임은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했다. 현재로 오면서 춤은 편안해졌고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았으나 회복했고, 많은 사람들의 염려 덕분에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고민하며 창작활동을 놓지 않는 사람이며, 무대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난 그들을 닮고 싶을 뿐이다.” 올해 박호빈은 새로운 주니어와 시니어에게 워크숍과 간단한 창작 작업을 하고 <시간속의 음영> 솔로작을 선보인다. 인도로 향한 지금, 더욱 단단해진 모습으로 진화해가는 안무가 박호빈은 통합적 세계를 꿈꾸며 전체성 회복을 통하여 만다라를 이룩하고자 한다. 그것이 인간을, 세상을 바라보는 박호빈의 진실 된 시선인 것이다.
글_ 장지원(춤평론가)
사진제공_ 박호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