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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 안무가,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차례로 증명해온 정재혁

정재혁은 세계 최정상급 현대무용단인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에서 주축 무용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무용단에 입단하는 한국 무용가들은 꽤 많지만 인턴이나 신입으로 잠깐 몸담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력이다. 몇 년 전 귀국해서는 창작자로서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 국내의 젊은 무용가들이 대부분 서유럽의 컨템포러리 댄스 스타일을 쫒아가는 것에 비해 정재혁은 미국의 현대무용(혹은 미국식 컨템포러리 댄스)에 베이스를 갖고 있다. 타 분야와 협업하는 연출보다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으로 주제를 풀어가는 안무방식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국내 무용계의 젊은 트렌드와 간극을 보이면서 도리어 정재혁의 차별성으로 자리 잡았다. 201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로 임명된 이래로는 학생 지도에 몰두하면서 활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노랑머리 선배가 준 충격


정재혁은 1977년 부산에 태어나서 평범한 남자아이로 자랐다. 보통 무용가들은 어렸을 적부터 끼가 남달랐다거나 무용선생의 눈에 띄었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혀 그런 조짐(?) 없이 지극히 평범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노랑머리를 한 선배가 단상 위에서 벌이 아닌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선 노랑머리의 학생이 단상에 올랐다는 점, 그 상이 춤을 잘 춰서 수여되었다는 점, 사내다운 모습의 남자 무용가였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전까지 자신이 갖고 있었던 모든 고정관념이 깨진 결정적 순간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 노랑머리 선배의 이전 담임선생님이 정재혁의 고3 담임으로 있었기에 춤을 배우고 싶다는 제자의 말에 곧바로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김남미 무용학원을 소개해 주셨다. 인생을 걸 정도로 진심으로 열렬하게 춤에 임해서인지 실력은 빠르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레슨비나 작품비가 많이 드는 까닭에 부모님의 입장은 “꼭 춤을 배워야겠냐? 정 배우고 싶으면 유명한 무용대회에서 상을 받아 가능성을 입증해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유명 대학 무용콩쿠르에서 상을 받았고 그 대학 무용과에 입학까지 할 수 있었다. 1년 안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니 그의 의지와 재능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뉴욕으로


1995년 정재혁은 부모님의 간곡한 바람대로 부산에 있는 경성대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남정호 교수를 만나 <겨울 나그네> 등 여러 작품에 무용수로 활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정호 교수가 갓 만들어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로 옮겨가자 다시 입시를 치러서 97학번으로 그곳에 입학하였다. 그러니까 정재혁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1기인 셈이다.


이듬해부터는 무용계에서 주목받고 있었던 안무가 안성수 교수의 작품에 다수 출연하였는데 <제한>, <여유 있는 마을>, <시점> 등이 있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무용수로 이나현(전북대학교 교수), 원원명(울티마 베즈, 마리 쉬나르 무용단 단원), 윤수연(로사스 무용단 단원) 등이 있었으니 지금의 관점으로서는 꽤 호화 캐스팅이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던 정재혁은 2003년에 오스트리아로 갔다. 하지만 자신이 원했던 환경은 아니었고 이듬해 뉴욕으로 가서 댄스 스페이스(Dnace Space)라는 스튜디오에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거의 프로페셔널로 뛰던 그의 기대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감이 있었으나 학생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달에 28-30시간 정도 수업을 들어야 했다. 댄스 스페이스에서 배우기 시작한 지 며칠도 안 되어 게시판에서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 오디션 공고를 보게 되었으며 경험 삼아 간 오디션에서 덥석 트리샤 브라운의 눈에 들었다.

 

〈Hang-Out〉

 

트리샤 브라운에 정식 입단한 럭키보이


뉴욕에서 세계적인 레벨의 무용단의 경우 단 한 명의 무용수를 뽑는 오디션에 400-500명이 몰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선발 과정은 더욱 치열해서 1차에 며칠 동안 세 차례 정도의 ‘따라하기’를 통해 지원자 대부분을 탈락시키고 2차에서는 2-3개월 정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정식단원들과 함께 여러 가지 춤 훈련을 시킨다. 이때 순수한 춤 실력뿐만 아니라 무용단이 필요로 하는 표현력, 적응력, 순발력 등을 다각적으로 관찰한다. 그리고 3차는 면접이다. 안무가가 지원자를 흡족해하면 1개월 만에도 선발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6개월도 더 지연될 수 있다. 그야말로 100% 마음에 들지 않으면 뽑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시대가 바뀐 지금은 과정이 좀 더 간결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200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일사천리로 거친 정재혁은 주변인들에게 ‘럭키보이’로 통한다. 무엇보다도, 외국인으로서 비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단하여 결국 예술인 비자까지 받게 된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잘 풀린 경우’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안무가를 비롯한 무용단 관계자들을 매혹한 그만의 무용수로서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트리샤 브라운은 포스트모던댄스의 기수들 중 하나로서 이후 등장하는 안무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에서 주축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미국 전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쉴 새 없이 공연을 펼쳤다. 특히 프랑스 파리에는 주기적으로 초청공연을 하러 다녔는데 파리오페라발레단에 트리샤 브라운 레퍼토리가 있었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자 자신의 춤이 고착화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 중간 사샤 발츠, 앙즐렝 프렐조카주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의 관심도 받았고 직접적인 러브콜도 있었으나 옮겨갈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귀국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Understand〉

 

국 후 창작자로서 자리 잡아 가기


2010년에 귀국하여 뉴욕을 왔다 갔다면서 서서히 국내 정착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창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년간 십 수 군데의 지원프로그램에 신청했으나 하나도 선정되지 못했다. 그 맘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정현진에서 정재혁으로 개명했는데, 지원 심의를 하는 선생들이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2012년 모다페에서 <다섯 가지의 법칙>을 시작으로 하여 매해 꾸준하게 창작 및 공연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발표한 작품 몇 가지만 추려보면 <뒤바뀐 새벽>(2013 모다페), <카르페디엠>(2014), 〈FATAL〉(2014 창작산실), 〈Understand〉(2017 스파프), <에라 모르겠다>(2018 K-arts), 〈Playground〉(2019 K-arts), <척>(2019), 〈놀음-Hang out〉(2020 모다페)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 셋을 조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재혁의 〈FATAL〉은 2014 창작산실 올해의신작의 일환으로 12월 22-2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선보여졌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이라는 제목처럼, 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상대를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가 누구인지는 맨 마지막에 밝혀진다. 세 명의 남자들 중에서 두 명의 남자는 외모와 체격과 같은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맨 처음에 시선이 가는 쪽은 아무래도 그 둘일 수밖에 없다. 초반에 두드러지는 움직임을 펼친 것도 그들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전개될수록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생긴 작은 키의 남자가 춤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기교적인 숙련도와 무대 장악력 그리고 자연스러운 표현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장점은 많았다. 그가 살아나면 살아날수록 다른 두 남자의 춤은 어설프고 경직되어 보인다.


그들은 개별적인 움직임을 펼치기도 하고 트리오로 움직임을 엮어가기도 한다. 또 여자무용수들을 여러 형태로 들어 올리면서 조형적인 움직임을 시도하기도 한다. 춤의 짜임새가 견고한 앞부분에 비해 뒤로 갈수록 치밀성이 떨어지는 느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중략) 마지막에 단상을 사용하여 세 남자가 똑같은 키를 유지하자 여자가 선택한 이는 외형적으로 가장 떨어진 남자다. 그 남자가 딛고 선 단상은 결국 그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두 남자마저 엄지손가락을 올릴만한 그만의 매력이야말로 진정한 옴므파탈에서 대한 전현진의 해석이다. 

<댄스포럼> 2015년 2월호

2017년에는 그동안의 예술적 탐구가 열매를 맺은 〈Understand〉란 신작이 10월 14-15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SPAF 2017의 일환으로 소개되었다.  

 

〈Understand〉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문제와 그 해결을 ‘이해’라는 주제로 풀어간다. 이에 대한 뚜렷한 표현보다는 정재혁이 항상 추구해온 데로 움직임 구성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바닥에 입구, 거실, 방, 테라스 등의 집 도면을 테이핑 해놓은 노보의 비주얼아트다. 여기에 이예별의 바이올린 라이브연주까지 어우러져 현대무용과 타 분야와의 인터액티브를 실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요소는 여전히 안무 그 자체다. 자연스러움 속에 정교함, 부드러움 속에 강약을 지닌 움직임에서 정재혁의 춤 메소드가 한층 성숙하고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본 패턴을 유지하면서 발전과 변화를 꾀하는 안무가 마지막까지 짜임새 있게 이어졌는데, 이는 작품의 말미에 급속하게 힘이 빠지곤 했던 예전의 단점을 극복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의 첫 부분에 안느 테레사 드 키에르스매커의 분위기가 언뜻 나는듯하더니, 차츰 정재혁의 주요한 경력을 차지하는 트리샤 브라운 메소드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자기만의 춤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마무리 지었다는 것이다. 마치 묵직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춤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춤> 2018년 2월호

 

<에라 모르겠다> 

 

팬데믹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상황에서 2020 모다페에서 초연한 〈놀음-Hang out〉은 한국적인 컨템포러리 댄스에 대한 도전 의식을 담고 있는 정재혁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다.  

 

〈놀음-Hang Out〉은 격조 있고 우아하면서도 의외로 소박한 동래학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기본 동기가 되는 춤사위를 컨템포러리 댄스로 치환해 놓은 것이다. 한국 양반의 춤이 서양 귀족의 음악과 어우러져 독창적인 미감을 생성하기도 한다. 아홉 명의 무용가들은 다리로 크게 내딛고 뛰어오르고, 팔을 들어 올리고 돌리는 등의 비교적 심플한 모티브를 반복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의 변화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정교하다. 이러한 안무 방식은 미주나 서유럽의 안무가들에 의해 시도되곤 하는데 어느 정도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갖지 않으면 제대로 실현해내기 쉽지 않다. 무용가들이 유연하고 부드러운 플로우를 이어가면서 호흡의 장단과 움직임의 밀도를 쥐락펴락할 수 있어야 하는 안무라는 점은 새겨봐야 할 것이다. 

<춤> 2020년 6월호

여기서 2014 창작산실에 선보인 〈FATAL〉은 대규모 장치를 활용한 점에서 새로운 도전이었으며, 〈Understand〉(2017)와 〈놀음-Hang Out〉(2020)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안무 구성에 집중한 작품으로 국내외적으로 20여 차례 초청 및 순회공연을 해온 대표 레퍼토리다.  


정재혁에게 있어 창작의 정체성은 움직임 구성 그 자체다. 춤이란 근본적으로 움직임을 주요 텍스트로 하는 예술 분야이기에 움직임 구성을 가장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을 갖춘 후 다른 분야와의 융복합을 시도해야 제대로 된 시너지를 확립할 수 있다. 최근에 기본이 확립되지 않은 채 다른 장치나 효과에 기대는 창작을 하는 무용가들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창작과 교수로서 새로운 임무와 도전


정재혁은 201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창작과는 그 초창기에 정재혁을 비롯하여 정영두, 윤푸름 등 주요한 활동을 펼치는 무용가를 다수 배출했으나 2010년대 들어 예전만 못하다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젊고 열정적인 교수를 수혈함으로써 재도약을 기대할 수 있게 된 만큼 정재혁의 어깨가 무거워진 상황이다. 


이를 인지하고 있어서인지 정재혁은 최근 학생 지도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학생 역량 강화를 위한 레슨과 워크숍뿐만 아니라 국내 전역과 외국에서의 공연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춤 활동 영역의 확대에도 심혈을 기울이면서 연극, 뮤지컬, 클래식콘서트 등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21세기도 20년 이상 지나고 있는 지금, 학생의 숨은 적성을 발굴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고취하는 이러한 지도 방식은 매우 적절하다.

 

〈Fatal〉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사진제공_ 정재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