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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작가

다양한 예술적 외피로 지역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무용가 박광호


울산은 우리나라 6개 광역시 중 가장 늦게(1997년) 광역시가 된 도시로 공업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대학 무용과는 없지만, 2000년 12월 창단한 시립무용단이 있으며, <처용무> <전화앵> <울산학춤> 등 신라시대부터 이어 온 춤 전통이 살아있고, 지역 장터를 돌아다니며 풍물, 솟대타기, 죽방울 놀이, 줄타기 같은 기예와 탈놀이를 펼친 ‘죽광대 놀이’의 흔적도 남아있다. 무용 단체나 개인 무용가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지역의 역사와 현실 문제를 담은 작품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박광호는 울산의 공연 판을 전천후로 누비며 참여하는 판마다 춤의 색을 입히고, 다른 장르와 어우러지면서 춤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무용가이다. 전문 무용가의 길로 들어서기에 다소 늦은 고3 때 무용을 시작한 박광호는 애초 관악기를 배우고 있었지만, 호흡기 쪽이 좋지 않아 담임 교사의 권유로 무용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악기를 배운 경험은 박광호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처음 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접하고, 남자가 타이츠만 입고 수업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한국무용을 선택했다. 대학 입학 후 정신없이 여러 공연에 참여했고, 콩쿠르도 준비할 기회가 생겼지만, 춤을 춘 기간이 짧아서인지 춤추는 것에 관한 정체성을 제대로 갖지 못했던 그는 부담감 때문에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다행히 안정을 찾아 적극적인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졸업 후 부산시립무용단 비상임단원, 창원시립무용단 상임단원, 정동극장 단원으로 활동한다. 그뿐만 아니라 ‘창작집단 놀’, ‘놀래놀래’, ‘아트키네틱 바람’ 등 작은 단체를 만들거나 다른 단체와 협업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선생님, 선후배, 동료에게 춤을 배우고, 춤에 관한 고민이 깊어졌고,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무용가로서 입지를 쌓으며, 예술적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박광호의 춤 세계를 규정짓기는 쉽지 않다. <한량무> <학춤> 등 전통춤과 창작 춤을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태평소, 기타, 건반 등 악기를 다루고, 죽방울 놀이, 버나돌리기를 수준급으로 하고, 사물을 다루는 솜씨는 전문 악사 못지않다. 작곡과 음악 편집도 능숙하다. 그의 춤은 우리 춤의 진중함과 자유로운 힘,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매끄럽게 오가는 맛이 있다. 여성 춤꾼들과 군무에서 남성 춤꾼의 전통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이질감 없이 여성 춤에 녹아든다. 무대에서 자신이 나설 때와 기다리고 머물러야 할 때를 판단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런 다양한 능력 때문에 한때 부산 춤판에서 박광호가 출연하지 않은 공연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이 두터웠다. 부산과 경남, 울산, 서울까지 그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 많았다.

 

<산 그리고 범>

 

그의 춤 여정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반려자를 만나 울산에 정착하면서부터다. 반려자인 행위예술가이자 미술가 이뤄라는 울산을 중심으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작가인데,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춤과 퍼포먼스는 움직임과 상황, 시간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춤 작품이 서사와 음악에 의존하는 것에 반해 퍼포먼스는 일정한 서사보다 수행성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수행성은 발화를 통한 변화를 말하는데, 여기서 발화는 언어적 발화만이 아니며, 관객이나 참여자가 퍼포먼스의 과정과 결과에서 어떤 변화를 감지하거나 변화 과정을 체험하는 것이다. 춤과 퍼포먼스가 만나면, 춤은 수행성을 얻고, 퍼포먼스는 서사를 갖게 된다. 두 사람은 춤과 퍼포먼스의 장점을 공유하면서 자기 영역을 확대하고 상대를 변화시켰다. 이로써 박광호는 다른 무용가가 경험하기 쉽지 않은 또 하나의 예술적 외피를 얻게 되었다.


그에게 기억에 남는 작품을 물었다. 2019년 ‘창작집단 달’에서 창작한 <뭍으로 나온 처용>을 들었다. ‘창작집단 달’은 박광호가 10여 년째 예술감독을 맡은 단체이다. 이 작품 창작에 참여하면서 노동자의 삶과 노동의 가치 그리고 현실에서 노동자의 고충에 관해 고민했다고 한다. 공업도시 울산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살펴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박광호가 창작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간결하고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으로 대중에게 많이 소비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메시지를 최소화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뭍으로 나온 처용>은 다양한 기법과 속도감 있는 연출로 다소 무거운 주제를 무리 없이 전달한 작품으로 그가 생각하는 창작의 방향과 일맥상통한다.


<뭍으로 나온 처용>은 담백한 구성, 적절한 상징의 사용으로 주제를 뚜렷하게 전달한다. 전통춤 사위와 노동을 응용한 몸짓, 에어리얼 기법으로 심상을 표현하거나 마지막 다짐을 담아내는 연출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노동자가 처한 현실 모순에 대한 어설픈 화해나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 <뭍으로 나온 처용>은 무대를 일터 삼아 펼친 현실을 담은 춤판이며 삶의 춤이다. 사변적 주제가 넘쳐나는 작품들 가운데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 춤의 사회적 가치를 보여 주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에 맞서는 것처럼 말이다.


<댄스포스트코리아> 2021년 6월, 이상헌

<뭍으로 나온 처용>

서울 이외 지역에서 젊은 춤꾼의 역외 유출은 이제 더는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그나마 남아 있는 지역 무용가들의 활동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함께 할 춤꾼을 찾을 수 없어 안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창작이 위축되기 때문이다. 박광호의 존재 가치는 이러한 지역 무용계의 위기 상황에서 빛나는데, 그가 여태 다져 온 다양한 예술적 경험이 위축되고 있던 울산 무용 판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서로 다독이며 견뎌야 할 지역 무용계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밑을 받쳐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박광호는 “앞으로 좋은 사람들과 춤추면서 가끔 저의 이야기를 내놓으며 살고 싶다.”라고 계획을 말한다. 어떤 주제를 다루고 싶다든지, 반드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춤과 일상을 나누면서 그 춤에 자신의 이야기를 싣고 싶다는 꿈이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관리하고 다독이면서 주변까지 살펴야 한다. 그의 꿈은 예술가로서, 또한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지금 여기’ 남성 무용가의 지극히 현실적인 바람이다. 자신을 지키면서 공동체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로 오래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박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