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가 박순호는 탄탄한 전문성과 함께 대중적 수용력까지 갖춘 현대무용가로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 인간의 관계, 번뇌, 본능, 욕구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라든가 인간의 신체를 한계치까지 몰아가는 피지컬한 연행은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관객에게 그만의 창작 스타일을 새겨 놓았다. 브레시트댄스컴퍼니를 통해 발표한 <人_조화와 불균형>, <활_조절하다>, <유도>, <경인(京人)> 같은 레퍼토리는 이러한 예술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실제화한다. 2023년 6월 11일 서초동 모 커피숍에서 박순호의 활동상과 예술세계에 좀 더 면밀하게 다가가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넌 꼭 무용을 해야 한다”
1975년 서울 출생인 박순호는 다른 남자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춤을 접하게 되었다.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갖가지 서클이 활성화되어 있는 환경이었다. 연극부에 들어가면 머리를 자유로이 기를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말에 덥석 입부서를 냈다. 연극부에서는 여름마다 특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 기계체조, 재즈, 무용 등을 배운 기억이 난다.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하다 보니, 무용을 가르쳤던 용인대학교 출신의 백찬구 선생이 “넌 꼭 무용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서초동 소재의 ‘발레하우스‘라는 학원에 구경삼아 갔다가, 한 남자가 발레를 멋있게 추는 것을 보고 “무언가 찌릿한 느낌이 왔다!”고 한다. TV에서 봤던 대중적인 춤과는 전혀 다른 신체 표현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용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시기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니 부모님의 반대는 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다. 결국은 아버지와 남자 대 남자로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나서 겨우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무용을 너무 늦게 시작해서 당시 후기였던 한성대학교 무용학과에 겨우 들어갔다. 턴(turn)도 안 배우고 입학한 상태라 대학 내내 이것저것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성대학교 현대무용 전공의 박인숙 교수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선,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신체 기능을 향상할 수 있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대학교 4학년 때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하여 병역 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콩쿠르에서 내로라하는 무용수들과 경쟁해서 이루어낸 성과이니만큼 그가 대학 시절 얼마나 치열하게 훈련을 거듭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박인숙 교수는 권위적이지 않았던 성품으로 제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창작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놓았다. 이에 박순호는 “예술가마다 타고난 개성이 있는데다가 춤 스타일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것인데, 획일적인 스타일로 묶이지 않은 게 매우 좋았고 내가 창작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한다. 더 나아가, 박인숙 교수의 대표작 <마리아 콤플렉스 시리즈>에 6년 정도 출연하면서 안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직간접으로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해외 유학을 통한 성장
2003년에는 네덜란드국립안무센터에서 2년간 유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에 있는 안무전문학교로서 한국에서는 접하지 못한 새로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신체적 기능과 안무적 구성을 모두 향상시킬 수 있는 워크샵 중심의 1-2주 단위의 인텐시브한 교육이 이루어져 직접적인 도움이 됐다. 구체적으로는 움직임 구성, 움직임 리서치, 즉흥, 조명, 음악, 개인 작업 등이 있었는데 그중 접촉즉흥, 알렉산드라 테크닉, 안무법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탄츠하우스를 통해 유럽 전역에서 온 무용가들의 창작과정과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에 열정적으로 임했던 박순호는 솔로나 듀엣 작품을 만들어서 독일에서 신진안무가상을 받는 등 일련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마음껏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노력과 시기가 맞은 빠른 성취, 국제교류
한 단계, 아니 두세 단계 성장한 무용가로 귀국한 박순호는 이제 안무가로서의 도전을 시작하였다. 학생용 소작품에서 벗어나 규모를 갖춘 군무를 짜고 싶다는 열망에 집중적으로 탐구를 거듭하였다. 2004년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을 시작으로 안무가로서 정식 출사표를 냈으며 노력과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는지 대단히 빠른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듬해 예술경연지원센터에서 개최한 제1회 팜스(PAMS)에서 선보인 〈Life Force〉란 작품부터 해외 무대로의 길이 열렸다. 국내에서 국제교류에 대한 공공적인 지원이 시작될 무렵이어서 상당히 운이 좋았다. 박순호는 이경은, 정영두와 함께 국제교류 활성화를 위한 직접적인 지원을 받은 1세대로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은 셈이다. 물론 실력 없이 이러한 성과가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박순호는 국제교류가 활발한 국내 현대무용가들 중에서 해외공연이 가장 왕성한 편이다. 미국 제이콥스 필로우 댄스페스티벌, 멕시코 세르반티노 페스티벌, 독일 탄츠 메세, 브라질 세나 현대예술축제 같은 세계적인 축제를 비롯하여 북미, 남미, 유럽, 아시아 13개국에서 103회 이상 공연을 펼친 바 있다.
박순호의 안무 정체성을 알린 레퍼토리들
박순호의 분신인 브레시트댄스컴퍼니는 2011년에 창단되었다. ‘Bereishit’는 히브리어로 구약성서의 첫 단어로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피지컬한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그의 방법론은 접촉즉흥을 근간으로 자연의 물리법칙, 행동양식을 통한 몸짓 표현, 운동 감각적인 가능성을 내재한다.
브레시트댄스컴퍼니를 통해 발표한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人_조화와 불균형>(2011), <활_조절하다>(2016), <유도>(2016), <경인(京人)>(2017)을 꼽을 수 있는데 모두 인간의 관계, 번뇌, 본능, 욕구라는 공통된 주제 의식을 갖추고 있다. 박순호는 스스로를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돌이켜보면 작품 자체가 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시기마다 내가 느끼면서 관심 있고 궁금하고 고민하는 부분을 작품화하였는데 예를 들어 관계를 힘들어할 때는 그러한 심리가 작품에 반영된다.”고 한다.
2016년 여름 제이콥스 필로우 댄스페스티벌에서 공연한 <人_조화와 불균형>은 제목 그대로 예술적 춤의 활동 모티브로서 조화와 불균형을 근간으로 한 움직임을 펼쳐 보인다. 특유의 피지컬한 움직임은 절제와 밀도를 내재한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 판소리와 사물놀이를 대동하여 한국적인 풍취를 더한다.
<활_조절하다>는 2016년 겨울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국악원의 공동기획으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활이라는 소재의 형태적 접근이라든가 활쏘기라는 움직임의 작용 원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가운데, 활에 인간의 몸 그리고 활쏘기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적 상황을 중첩시켜 놓았다. 두 작품 모두 정철인, 정재우, 류지수가 출연하여 창의적 동작과 유려한 구도를 더할 나위 없이 실제화하여 작품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춤> 2020년 9월호
신작 <유도>는 단순이 현대무용에 유도를 융해시킨 것만은 아니다. 접촉즉흥이라고 하여 둘 이상의 무용가들이 서로 신체의 일부를 접촉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원리는 박순호 춤의 근간을 이룬다. 이렇게 무용가들이 맞닥뜨리면서 인간의 공격성과 스포츠의 엄격한 규칙을 그려낸다는 전개에다가 도취나 무아지경을 이끌어내는 몰입놀이란 뜻의 일링크스(ilinx) 개념까지 도입하여 나름 복잡하고 중첩적인 구성을 시도한다.
프리뷰 <시사저널> 2016년 4월 16일
<경인(京人)>은 말 그대로 서울 사람들을 뜻하는데, 여기서 서울 사람들은 문화와 정보와 트렌드에 강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물질적 욕망과 정서적 결핍 사이에 혼돈을 일으키는 현대사회는 모순적이다. 이는 몇 가지 장면들에서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움직임에 따라 예민하게 흔들리는 눈금저울, 과잉 생산과 소비의 공허함에 대한 스피치, 숨 가쁘게 달려온 인간의 진화와 발전의 역사에 대한 이미지도 제시된다. 확장된 작품에서 강조되는 정서적인 불안은,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징인 직립보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수직축으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전하고자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욕망이 대상이 아닌 결핍이라는 깨달음이다.
박순호는 동작 구성력 이상으로 무용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해왔는데, 여기서도 서너 명의 남자무용수가 돋보였다. 커다란 사자탈의 엉덩이 부위에서 빠져나온 류지수는 자유롭고 탄력있게 움직이면서도 순간적으로 난이도 높은 동작을 아무렇지 않게 수행하곤 한다. 정지한 자세에서 갑작스럽게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실행하기까지 한다. 요즘 부쩍 물이 오른 류지수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정재우와 정철인 그리고 신예 문경재가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마치 한 몸을 이루듯 조형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이다. 박순호의 페르소나로 일컬어지는 정재우, 정철인, 류지수의 3인무에 비해 아무래도 기술적인 동작성이 완화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바로 이렇게 자제된 동작성으로 인해 작품의 흐름에는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국립현대무용단 프로그램> 2017년 10월 13-15일; <춤> 2019년 10월호
단원 기량 향상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안무가
박순호의 창작 스타일은 인간의 신체를 한계치까지 몰아가는 피지컬한 연행이 두드러진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구현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니, 단원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시작 전에는 무용수와 수차례 면담을 통해 “나의 움직임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신중히 고민하고 대답해야 한다. 막상 들어오면 오랜 기간 몸담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받곤 한다. 입단해서는 육상이나 허들 혹은 웨이트 운동 같은 운동성 트레이닝으로부터 바운스, 스윙, 무게 등을 활용하는 움직임 훈련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
운동 수행 능력이 높아졌다고 해서 다는 아니다. 접촉즉흥 중에서 타인과 깊숙이 침투하여 움직이는 기법을 중시하는 데 단원들 사이의 관계에서 갈등과 타협을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면밀한 호흡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브레시트댄스컴퍼니의 일상이기도 하다. 옛날 만화 중에서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박수호는 단원들을 여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렇게 역량이 강화된 단원으로 이재영, 정철인, 정재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현재 국내 무용계에서 현대무용가로 꽤 이름을 알리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박순호는 성균관대학교 박사과정을 밟느라 그동안 다소 주춤했던 창작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므로 창작적 결에 맞는 움직임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 더 바람이 있다면, 지난 13년간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축적해온 접촉즉흥 기술을 망라하여 책으로 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한다.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사진제공_ 박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