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하고 당차게 전통춤의 동시대적 의미를 탐구하는 무용가 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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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라는 미지 세계의 매력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때, 춤에 관해 잘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만화책에 나오는 동작을 따라 하며 종이컵에 휴지를 욱여넣어 토슈즈를 만들어 신었던 11살 소녀는 자신이 고립무원의 들판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E. Husserl)은 이런 현상을 두고 “자기 내면으로부터 직관적이며 동시에 맹목적으로 활동하도록 추동하는 ‘혼령’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혼령은 ‘예술본능’을 말한다. 예술가에게 예술본능은 종종 주체할 수 없는 힘,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작동하면서 예술창작의 발생적 원천이 된다.

10여 년 전 한지은의 춤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러 춤꾼 중에서도 확연하게 움직임이 눈에 박혔다. 발 디딤이 굳건하고도 경쾌하며, 세밀한 호흡을 여유롭게 소화하는 작은 체구가 무대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뿜었다. 당돌하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는 춤 태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당시 한지은은 부산대학 무용과에서 강미리 교수 파트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는데, 그의 춤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었다. 한지은은 “다양한 악기 춤과 전통춤 레퍼토리 등으로 한국무용의 어마어마한 유산들을 접하면서 알찬 대학 생활을 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스승이 내어 준 많은 미션을 해내면서 창작 춤에 접근하는 방법과 제작 방식을 익혀 나갔다. 예술본능의 발현 이후 본격적으로 자기 의도를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갔던 것이다. 2007년 졸업 작품인 <울음 울며>를 창작해 부산무용 콩쿠르에서 은상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졸업 후 한동안 ‘강미리 할 무용단’의 주축으로 활동하면서 부산 춤판에 존재를 서서히 각인시켰다. 스승 강미리 교수는 그의 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지은은 스승의 작품 <柳-류>(2009)에서 신체 에너지의 단계적 운용과 몸과 마음의 몰입을, <弄-롱>(2010)에서는 전통춤을 현시대의 춤으로 변용해 내는 능력을, ‘할(喝) 하나’ <길에서 춤을 묻다>(2015)는 내면의 카오스를 춤으로 질서를 갖추는 법을, 작품 ‘할 셋’ <염-念 도드리>(2017)에서는 전통의 형태소를 현대적 춤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한지은의 춤은 이 시기를 지나면서 전환하게 된다. 스승과 선배들의 작품에 무용수로 출연해 작품의 제작 과정과 결과물들을 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이다. 대학원 졸업을 잠시 미루고, 서울에서 열린 안무가 캠프에 참가해 여성성의 치유와 회복에 관한 <붉은 서답>을 쇼케이스로 올렸고, 이후 <나비호랑>, <사이에서>, <몸봄맘봄>, <칼끝의 염원>, <오제> 등 개인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 밖에도 ‘M-note 현대무용단’, ‘이태상 프로젝트’ 공연 출연과 가끔 연극 안무를 맡는 등 타 장르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 영감을 받기도 했다. 2014년 새 물결 춤 작가전에 <내 안으로>를 출품해 최우수 작품상과 연기상을 받았고, 그해 부산문화재단의 청년예술가 지원을 받아 같은 작품을 1시간으로 재구성해서 첫 개인 공연을 했다. 2016년 <내 안으로>를 개작해 부산 무용제에서 우수상과 연기상을 받았다. 20분으로 만든 작품을 1시간짜리 개인 공연용, 40분짜리 경연용, 서울 국제안무페스티벌(SCF)에서 15분 등 각기 다른 구성으로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이때 후배들과 함께 작품을 제작하고 공연을 올리면서 ‘함께 추고 함께 만드는 춤’에 매료되어 2018년 ‘한국 춤 프로젝트 가마’를 창단했다. ‘한국 춤 프로젝트 가마’의 이름 ‘가마’에는 복합적 의미가 있다. 질그릇을 구워내는 가마처럼 새로운 춤 언어를 만들며, 음식을 익히고 우려내는 가마(솥)처럼 깊이를 가지고 춤에 정진하며, 사람 머리의 중심에 있는 가마처럼 우리 춤의 중심을 찾고, 전통춤과 창작 춤 레퍼토리를 제작해 이동 수단인 가마처럼 전통과 현대를 잇는 공연으로 관객과 소통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가뜩이나 위축된 지역 춤판에서 개인 무용단을 운영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른 이들처럼 지원금이 있을 때만 잠시 활동하는 방식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창단 직후 뚜렷한 활동은 못 했지만, 가끔 들어오는 프로젝트 형식의 공연에서 안무를 맡거나 무용수로도 출연하고, 교육 사업을 하는 등 3년 동안 내실을 다지고 연혁을 꾸리는 형태로 이어가면서 장기적인 시각으로 견뎌내었다. 처음에는 단체 역량에 맞게 단원의 안무 역량 강화로 기획한 3편의 단편 무용 <춤 에세이 전>(2021년)을 무대에 올렸고, <비손>, <진실의 변주>를 제작하였다. 2019년 개인 전통춤판 <도담>과 2020년 한지은의 춤 <변화무상>까지 3번의 개인 공연을 올렸다. 2022년 <춤집-잇다>를 발표했고, 올해 12월에는 숏폼 같은 짤막한 콘텐츠에 익숙해지는 현실에 도발하는 의미로 60분짜리 장편 무용 <回(회)>를 준비하고 있다.  

한지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부산 무용계는 점점 왜소화하고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었다. 대학 무용과가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폐과되거나 통합되어 무용 판에 공급되는 젊은 춤꾼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기성 안무가들이 작품에 적합한 무용수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하는 무용수를 구할 수 없어서 작품 자체를 수정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불균형은 장르의 편향을 말한다. 부산은 상대적으로 전통춤이 강세인 지역이다. 지역 춤 역사에서부터 민속춤이 활발한 배경도 있지만, 춤판이 전체적으로 위축되면서 버티고 있었던 무용가들이 부산을 떠나거나 춤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나마 문화재 종목 중심의 전통춤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 해에 집계되는 현대무용과 한국무용 창작 작품, 창작 발레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에 그친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용가의 가치는 높아진다. 그렇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존재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아지겠지만, 그 가치를 넓게 비교할 대상이 부족하고, 판 자체가 위태롭기 때문에 가치를 지켜나가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한지은은 신중하면서 도발적인 무용가로 자기 가치를 조용히 확고하게 다지고 있다. 작품마다 우리 춤의 본질을 탐구하는 진지함과 동시대적 의미를 녹여내려는 적극적 태도가 담겨있다. 작은 무대에서도 우리 춤의 본질에 관한 고민을 놓치지 않고, 큰 무대에서는 당돌하기까지 한 그만의 공간을 창출한다. 이런 저력은 끊임없이 연마한 전통의 자기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중국 당나라 황벽희운 선사의 오도송에 이런 구절이 있다. “추위가 한 번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 맡을 수 있으리” 득도한 고승의 깊은 뜻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고된 과정을 겪고서야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춤을 배워 무용가로 성장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무용가로 인정받기까지 자기 내부와 외부에서 몰아치는 삭풍과 맞닥뜨려야 한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들판에 선 춤꾼의 몸은 단순히 움직임을 발현하기 위해 단련해야 하는 매체에 그치지 않는다. 생각 이전의 몸, 감성에 앞선 몸, 역사를 담는 몸이다. 또한 생각 이후의 몸, 감성을 확산하는 몸이며 역사가 머무는 몸이기도 하다. 삶에서 얻는 깨달음을 춤으로 발현하는 존재는 사유의 이미지를 몸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온전한 무용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한지은은 우리 춤의 본질을 갈구하는 절실함과 두려움을 동력 삼아 정진하는 태도가 삶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니 앞으로 그의 작품이 우리 춤의 동시대적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지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지은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을 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때는 춤 속에 잠시 숨어들어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는데, 근래 저 자신이 춤으로 보호받고, 춤을 통해 치유되고,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작품 제작은 어렵지만, 함께 춤추면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대답은 아마 춤추는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지 싶다. 춤추는 일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 말이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한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