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 발레계에서 컨템포러리한 창작의 정점에 서 있는 이라고 한다면 이루다를 꼽을 수 있다. 발레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도 반항아처럼 파격적인 경험을 거쳐 온 다소 독특한 경력이 그녀의 창작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시청각적으로 앞서가는 형태의 작품으로 실제화되고 있다. 창작적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예술가를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순수한 기쁨을 주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루다를 2024년 2월 19일에 비대면으로 인터뷰하였다.
발레 엘리트 코스를 밟아는 가운데 성장통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루다는 네 살부터 발레를 접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긴 했으나 곧 발레의 예쁜 모양새에 푹 빠졌다. 어릴 적 사진들을 보면 집안에서도 핑크색 발레복에 슈즈를 신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많다고 한다. 이후 소위 말하는 발레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갔다.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 선화예술중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발레 무용가로서의 꿈을 향해 성장한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평탄했던 소녀 시절에 처음으로 난관에 부닥쳤다. 2차 성징을 맞으면서 체구가 커지게 되자 가늘고 마른 발레리나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생긴 것이다. 선이 굵고 힘이 좋으니 현대무용으로 바꿔보라는 선생들의 권유로 전공을 바꾸었으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 혼란은 계속되었다. 당시 그녀의 피난처가 미술반과 음악반 친구들이 만든 힙합 동아리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발레에 대한 미련은 강력해서 대학 입시 때 다시 발레로 승부를 보자 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테크닉을 연마하여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며 다행히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발레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발레 반항아(?)의 파격적인 행보
200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발레계에서 컨템포러리 발레는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비교적 앞서간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도 발레 전공 학생들 대부분이 바가노바 테크닉에 충실한 연습을 거듭하면서 클래식 레퍼토리 위주로 콩쿠르나 발표회를 준비하곤 했다. 이때 남들과는 다르게 이루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창작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창작 관련 클래스나 워크숍이 없다 보니 순전히 자기 노력으로 창작해야 했는데 그때 어머니 이정희의 도움이 컸다. 발레테크닉에 오래 젖어 있다 보니 새로이 동작을 짜야 한다는 게 매우 힘들었는데, 이때 “기존의 발레테크닉에 갇혀 있으면 안 되며 자기만의 스타일로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졸업 후인 2009년 무렵에는 컨템포러리 발레를 위주로 하는 유니버설발레단 세컨드컴퍼니가 갓 창단되어 그곳에서 2년간 활동하였다. 그리고는 좀 더 다양한 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2011년 홀연히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서 댄스아카데미 클래스, 컴퍼니 워크숍 등을 찾아다니면서 배우고 또 배웠다. 당시 <유 캔 댄스(You can dance)>라는 TV쇼의 우승자들이 개최한 클래스에서 여러 무용가와 연이 닿아 축제와 기획공연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뉴욕대학교나 뉴욕주립대학교의 안무가 과정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안무와 실연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마음껏 춤을 만끽하다 보니 처음으로 춤추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012년에는 비자 문제로 귀국했다가 방송국의 섭외로 TV쇼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게 <댄싱9>이다. 첫 방송에서 블랙스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었는데 그게 시청자들에게 깊이 새겨진 것 같다. 여전히 이루다를 알아보는 사람은 블랙스완으로 부를 정도로 자신의 대중적인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이루다의 창작적 성장을 담은 작품들
이루다는 뉴욕에 머무른 시기에 덤보페스티벌에서 솔로와 듀엣으로 된 작품을 발표한 바 있었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갖춰진 첫 작품은 2014년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발표한 <에고>를 들 수 있다. 이후 여기저기서 작품을 발표하다가, 2018년 동생 이루마가 독일의 한 무용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또 다른 경험을 위해 함께 출국하였으며 이는 또 한 번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컨템포러리 댄스의 본고장인 서유럽에서 이것저것 폭넓게 접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었는데, 특히 실험적인 창작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상에 상징적인 이미지를 담는 법이라든가 의상과 신체의 균형을 잡아가는 법 등에 관해 깨우칠 수 있었다.
서유럽에서의 경험은 이루다의 창작적 불씨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다. 2020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발표한 〈W〉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레벨업이 된 창작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 작품은 그해 한국춤평론가회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2022년 버전에서는 한층 짙어진 내음을 풍겼다.
삶의 각 단계에서 여성이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그린 〈W_2022 버전〉은 소녀가 여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변화, 또 하나의 생명을 출산하는 과정, 결혼으로 인한 속박감, 여성으로서의 자아정체성,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 등을 감각적인 안무와 연출로 이미지화(化)하고 있다.
여덟 명의 무용수는 솔로, 듀엣, 군무 등을 교차하면서 마치 거미집을 지어가듯 이러한 작품의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의상과 조명 등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하얀색, 검정색, 붉은색을 주도적인 색깔로 채택하여 강렬함과 세련미를 추구하였다. 청각적인 부분에서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결혼’ 같은 음악을 통해 여성 내면의 혼란과 충동을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W_2022 버전〉에서는 이루다가 임신한 여인으로 출연하여 후반부의 아이콘을 추가하였으며 풍선을 활용하여 임신과 출산 후의 신체 변화를 과장되게 묘사하는 등 몇 가지 이미지가 더해졌다. 무엇보다도 안무와 영상에 있어서 세부적인 요소들을 때론 감각적으로 때론 섬세하게 보강하였다.
<춤> 2022년 7월호
또 하나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디스토피아 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그중 2023년 <디스토피아 3>는 국내 발레 창작자로서는 드문 주제 의식과 전개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평소에 SF나 재난 영화에 관심이 많은 데 가상현실과 AI 등 첨단 테크놀로지가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현실과 비현실, 진짜와 가짜 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런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현재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염병, 환경오염, 기후재앙 등은 결국 스스로의 이기심으로부터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소설 속의 미래상으로 비치곤 했던 디스토피아가 바로 코앞에,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디스토피아 3>은 극단적인 사회구조 속에 정서적, 육체적으로 취약해진 인간의 불안정성을 표현한다. 번쩍이는 레자(인조가죽) 질감의 검은색 바지와 자켓, 부츠와 헬멧으로 무장한 이루다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내뿜으면서 쿠킹포일과 비닐로 이루어진 바디(body)를 테이프로 보완한다. 일단의 여성무용수는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분절되어 뒤틀리는 조작적인 움직임을 수행함으로써 AI 장착형 기계인형 같은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녀들의 춤적 실현이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으나 주제 이미지는 제법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다. 벌거벗은 남자는 인간성의 상징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려는 분투와 함께 길을 잃은 듯한 모호성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출구 없는 곳에 갇힌 듯한 분위기가 짙게 깔리는 가운데, 공연장 자체가 지하 2층에 있는 스튜디오형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느낌은 배가된다. 마지막은 모서리의 벽을 보고 앉은 남자 앞에 커다란 모니터 두 개를 이은 듯한 화면을 통해 갖가지 자연경관이 투영되는 장면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 속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은 씁쓸함을 남긴다. 절대자로 확립된 AI에 의해 가상(그러므로 허상)의 유토피아를 제공받는 상황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미래가 아닌가 한다.
<춤> 2023년 9월호
이와 함께 2023년 K-발레월드에서 선보인 <블랙 볼레로>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어둠 속에서 원초적인 감정이 한데 뒤얽히는 형상을 묘사하였는데, 그동안 꾸준한 탐구와 시도를 거친 영상과 조명이 한층 확장된 이미지를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주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끊임없이 창작적 성장을 위해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제대로 된 시청각적 융복합을 위한 노력
이루다는 안무에만 집중하는 창작자는 아니다. 시청각적인 요소를 적극 끌어다가 작품 표현의 범주를 최대한 확장하는 방식을 취한다.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제작비와 흡착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무용가에게 고액의 전문가 인건비도 큰 부담이지만 막상 만들어 놓은 시청각적 요소가 춤과 따로 노는 문제도 빈번하다는 점은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이루다 역시 창작 초기에 이러한 문제로 인해 많은 실패와 고민을 거쳤으나 직접 영상 편집을 배워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영상을 직접 만들기 시작한 〈W〉부터 미장센의 완성도가 대폭 상승한 것이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한층 성숙한 작품력으로 이어졌다. 현재는 사운드디자인에도 관심을 가지고 리서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창작적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예술가를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순수한 기쁨을 주기 마련이다.
우러러보면서 넘어야 하는 큰 산, 어머니 이정희
이루다가 지금까지 창작자로서 홀로 성장해 온 것 같지만 실상은 그녀의 어머니이자 1990년대 현대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인 이정희의 큰 가르침이 바탕하고 있다. 20대에 처음 창작을 시작할 때 “의미 없이 움직이는 행위는 안 된다. 자기만의 움직임 스타일을 구축해야 한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야 한다. 춤이란 몸의 언어다, 창작적인 움직임으로 주제를 실제화하는 것이다.”와 같은 조언을 해주셨다. 이는 기능적인 춤이 아닌 예술적인 춤의 의미와 가치를 정확하게 알려준 것이다.
창작자로서 어느 정도 고지로 올라선 지금에도 어머니는 하나의 산이면서 롤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이루다는 “어머니 이정희의 창작과 비교하면 나 자신의 창작은 항상 부족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는 큰 부담이면서도 끊임없는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그녀의 올곧은 자세는 앞으로 또 어떤 성장을 거듭해 갈지 지켜보게 하는 힘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루다는 올해 4월 26-28일 세종M시어터에서 서울시립발레단의 창단 공연에서 안무를 맡아서 <블랙 볼레로>를 대폭 수정 보완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창작적으로 적지 않은 것을 성취했으나 앞으로 더 큰 발전의 여지를 갖고 있는 이루다의 행보는 지켜볼 가치가 있다.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사진제공_ 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