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작가
Vol.125-1 (2026.1.5.) 발행
글_ 심정민 (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사진제공_ 권혁

꿈이 없던 소년, 춤이라는 꿈을 갖다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난 권혁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춤추던 친구를 따라 스트리트댄스 공연을 보고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에게는 꿈이 없었는데 춤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후 자연스럽게 친구와 함께 스트리트댄스를 배우게 되었으며 고등학교 때부터는 유명한 스트리트댄스 단체인 고릴라 크루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스무 살쯤 되었을 때 <발레리나를 사랑한 비보이>에 출연하면서 누군가의 소개로 현대무용 공연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또 한 번의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스트리트댄스와는 달리, 한 시간가량의 긴 호흡으로 신체의 선형을 이어가는 현대무용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춤 세상을 열어 보인 것이다. 현대무용을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에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를 거쳐 이십 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한성대학교로 편입하는 결단도 내렸다.
한성대학교에는 현대무용가 박순호나 강경모 같은 선배들이 일종의 롤모델로 자리잡고 있었다. 권혁은 박순호의 대표 레퍼토리 중에서 <유도>나 〈Balance and Balance〉에 출연하는 한편 당시 국민대학교에 있었던 강경모 교수의 작품에도 참여하면서, 춤을 어떻게 추고 만드는지에 대한 ‘감’을 잡아갔다. 두 현대무용가 모두 의미 없이 기술적인 동작을 남발하기보다 주제 이미지에 맞는 안무를 위해 노력하는 이라는 점에서 좋은 선례로 작용했으리라 본다.
이재영과 함께 창단한 ‘시나브로 가슴에’
권혁이 본격적으로 창작을 시작한 계기를 2014년 이재영과 듀엣 작품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외롭고 척박한 독립 무용 환경에서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둘은 서로 창작적인 교류를 통해 동반 성장해 가다가 2017년에는 아예 ‘시나브로 가슴에(COMPANY SIGA)’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후 ‘시나브로 가슴에’라는 단체명과 함께 권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무용계에 차근차근 알려갔다. 2019년부터 ‘While 시리즈’, 2020년 초연한 〈Zero〉, 2022년 시작된 ‘자연학 시리즈’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워낙 한 작품을 여러 차례 리바이벌하면서 차근차근 향상하는 스타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적은 수의 안무작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자기 페이스를 지키며 한 단계씩 향상되는 안무력
권혁의 안무 방식은 안무 교본에 충실한 스타일로, 주제 이미지에 관련된 동작적 모티브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발전하고 변형하고 다시 회귀하는 사이클을 유지한다. 이러한 스타일은 궤도에 오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소요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초기에는 안무 완성도를 10으로 치면 3-4 정도밖에 못 보여준 까닭에 노력은 확인되나 좀 더 지켜봐야 하는 무용가로 여겨져 왔다. 그러다가 2022년 대전 뉴댄스페스티벌 등에서 보여준 〈Zero〉는 안무 및 실행 역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023년 국제현대무용(모다페)에서 리바이벌한 〈Zero〉에서는 임계점을 넘어선 듯 폭발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동안의 안무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나 안무의 세부 묘사가 완전하게 채워진 데다가 춤의 장단, 고조, 강약 등이 풍부하게 새겨져 있어서 그러한 인상을 준 것이리라. 이에 대해 <춤> 2023년 11월호에 실린 리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Zero〉는 속도(Speed), 기본(Basic), 몸(Body)을 키워드로 천천히 조금씩 나아가는 춤의 단계적 수행이 마침내 얼마나 폭발적인 완성도를 갖출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Zero〉는 신체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신체에 내재한 에너지가 나를 넘어선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에 대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는 팔다리를 앞뒤로 휘저으면서 제자리에서 뛰는 기본 동작을 정말이지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에너지를 증폭해 가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조명이 켜지면서 고동과 같은 진동음을 배경으로 한 무리의 무용수가 팔다리를 앞뒤로 휘저으면서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한다. 단순한 움직임의 반복이지만 그 질감만큼은 단숨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을 갖췄는데 탄탄한 코어 힘을 바탕으로 한 실행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동작 모티프에 충실한 연행은 반복, 발전, 변형, 확장, 회귀하는 일련의 안무적인 성취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한층 높은 성취로 나아간다. 때론 조명의 위치, 각도, 음영을 바꿔 분위기를 변화시키기도 하며, 때론 무용가들의 대열을 모으고 벌리거나 선과 원으로 바꾸기도 하고, 때론 움직임을 크게 확장하거나 변주함으로써 조직적인 안무에 대한 심미적인 결정을 이끌었다.
2023년은 그동안의 무던한 노력의 성과가 꽃을 피웠던 해였다. 〈Zero_2023년 버전〉으로 이전보다 높은 성취를 확인시킨 데다가, 이에 힘입어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첫 번째 자연학 시리즈인 〈Earthing〉으로 서울예술상 프론티어상을 받은 것이다.-서울예술상 프로티어상은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그 무렵 남미와 유럽의 8개 도시에 투어를 다닌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완전히 올라선 창작력을 꽃피운 〈Earthing 2025 버전〉
권혁은 올해, 자기만의 페이스를 지켜가는 안무가로서 느리지만 착실하게 쌓아 올린 역량을 〈Earthing_2025년 버전〉을 통해 이제껏 가장 완성도 높게 펼쳐 보였다. 2025년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웹진에 실린 평문을 일부 발췌하자면 아래와 같다.

〈Earthing〉은 “우리는 땅 위에 서 있고 땅 위에서 움직인다. 땅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내고 땅으로부터 모든 것을 버티고 있다.”라는 표어가 말해주듯, 대지의 에너지와 땅의 연결성을 소재로 한다. (…)
의식성이 짙게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동작적 모티프를 반복, 발전, 변형, 회귀의 사이클을 유지하면서 점차 확장해 간다. 교본과도 같은 안무적 확장으로 인해 작품 전체가 탄탄하게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깊은 호흡과 밀도를 유지하면서 점차 확장되어 가다가 어느새인가 근원적인 자세나 위치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자연 친화적인 창작과 어울림이 상당하다. 음양의 조화, 땅의 울림, 순환적 에너지, 기의 흐름 등이 한데 융해되어 자연의 신비라는 분위기를 돋우는 것만 같다. 실제로, 무용수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양분을 받아들이는 커다란 두께의 나무를 둘러싸면서 생명력에 대한 찬양의 몸짓을 흩뿌린다. 다음 순간 얽히고설킨 물줄기를 따라가는 듯한 대열을 보이기도 한다. 숲의 대기를 이루는 깨끗한 숨을 자양분 삼기도 한다. 자연 친화적인 움직임에 관한 심오한 탐구가 확인되는 까닭에 생태예술적인 뉘앙스도 짙게 느껴지는 바다.
권혁은 일찍이 이십 대 중반에 긴 호흡으로 신체 선형을 이어가면서 일련의 주제 이미지를 구현하는 현대무용에 매료된 이후 자기만의 안무 메소드를 구축하기 위해 무던하게 걸어왔다. 한 발자국씩 차분하게 걸어온 그의 여정은 이제 풍성한 예술적 자양분이 되어 고유한 춤의 형태를 이루어냈다. 이러한 페이스를 가진 무용가는 빠르게 주목받지는 않으나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선 이후로 쉽게 주저앉지도 않는다. 권혁이 많은 열과 공을 들여 일구어낸 춤 메소드가 계속해서 예술적 결실을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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