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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직조하는 창작자 - 정보경

〈drive-thru〉(2010)ⓒ강낙현

정보경은 컨템포러리 한국창작무용을 본격화한 창작자로 일컬어질 수 있다. 2010년 스페인 빌바오 안무대회 그랑프리, 2011년 크리틱스초이스 최우수상, 2019년 한국무용제전 최우수 작품상, 2019년 대한민국무용대상 문화체육부 장관상 같이 안무가로 받을 수 있는 주요한 상을 다수 받았으나 정보경의 예술적 가치는 이러한 상들로 대변되는 것이 아닌 <고맙습니다>나 〈ONE, 源〉 같은 작품으로 대표된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주목할 만한 경력을 굳건히 받쳐주는 것은 재능과 노력 그리고 고난이었다. 

 

 

확실히 남달랐던 어린 시절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보경은 미래의 창작자다운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MBC 4기 탤런트였던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이것저것 흉내를 내기 시작하였다. 네다섯 살 무렵에는 마이클 잭슨을 너무 좋아해서 흰 양말을 신은 채 아빠 장갑을 잘라 끼고는 그 독특한 춤을 따라 했다. 집에 오가는 손님들은 문워크를 하는 아이를 보고 ‘어디에 내놓아야겠네’, ‘춤을 배워야겠네’라고 하곤 했다. 

 

일곱 살이 되자 부모님도 집 밖으로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우연히 알게 된 리틀엔젤스에 시험을 보러 갔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무용을 배워온 것 같았다. 정식으로 무용을 배운 적이 없었던 정보경은 방구석 히트였던 마이클 잭슨 흉내 춤을 추고는 덥석 붙은 유례없는 케이스가 되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오다가다 마주치는 단장과 선생들이 ‘너구나 마이클 잭슨 춤으로 들어온 아이가’라곤 했다. 

 

리틀엔젤스는 1962년 한국 문화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목적으로 창단된 어린이예술단으로서,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7,000여 회를 공연할 정도로 문화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여기서 정보경은 춤과 노래를 배워서 공연하는 게 너무 좋았다. 특히 <꼭두각시> 같은 개성이 두드러진 작품을 잘해서 칭찬을 받곤 했다. 아버지는 내심 뮤지컬 배우로 나가길 바라셨지만 정보경의 마음은 이미 춤에 대한 확고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화예술중학교와 선화예술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힘든 청소년기는 훗날의 자양분

 

정보경의 인생에서 첫 번째 고난은 고등학교 때 갑자기 찾아왔다. IMF 시기에 아버지의 중국 사업이 잘못되어 가세가 기울었던 것이다, 거의 학교를 못 다닐 지경이 이르렀기에, 따로 돈이 드는 방과후수업이나 레슨은 전혀 하지 못했고 정규수업만 열심히 들었다. 혼자 학교 연습실에서 정규수업 시간에 배웠던 것을 복습하면서 아직 앳된 소녀가 무엇을 삼키면서 미래를 꿈꾸었을까. 

 

일찍이 자기 자신밖에는 없음을 깨달은 정보경은 뭐든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혼자서 알아서 잘하는 특이한 학생으로 인식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김수현 선생이 국립무용단에 다니는 선배를 붙여줘서 무료로 조금씩 배우기도 하였다. 대학 입시 역시 스스로 해결해야 했는데 수능,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전부 보는 대학이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 판단하여 성균관대학교를 선택하였다.

 

<고맙습니다>(2011)ⓒ김두호

 

춤 인생의 진정한 은사를 만나다

 

정보경은 스스로 짠 입시작품으로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에 99학번으로 당당히 입학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무용계에 한동안 널리 알려졌는데 그 주인공인 정보경이었던 것이다. 당시 갓 부임한 임학선 교수에게 첫 입시 학생이었던 정보경은 강한 인상을 심어줬음에 틀림없다. 정보경 스스로도 춤 인생의 진정한 은사로 임학선 교수를 꼽는다. 

대학 시절 내낸 정보경은 약점이라고 생각한 키 작고 왜소한 체형으로 보다 길게 보이는 춤을 추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고민과 노력을 임학선 교수도 인정하여, 독려와 함께 장학금을 챙겨 주셨다. 정보경은 원래부터 연습벌레였지만 자신을 인정한 은사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더욱더 열심히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2021년인 현재 임학선 교수와의 인연은 22년째 이어지고 있다. 

 

<각시>(2019)ⓒ옥상훈

이른 첫 안무작에서 또 하나의 난관이

 

무용수로서의 활동은 이르면 19~20살부터 시작할 수도 있으나 안무가는 빨라야 서른 내외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 배우와 감독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신체적인 기량을 최우선시하는 무용수에 비해, 안무가는 작품을 종합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다각적인 역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교육과 경험과 탐구의 기간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경이 스물일곱에 첫 안무작을 발표했다는 것은 상당히 빠르다고 할 수 있다.

 

2007년 당시 무용전용극장인 M극장에서 신진안무가전을 마련하였는데 사전회의 때 선정자였던 김태원 평론가께서 ‘너무 어린 것 같다’면서 돌려보내신 기억이 있다. 임학선 교수께서 자신을 한 번 믿어보라고 해 〈가시를 삼키다-절벽 아래 집 ver.2〉가 성사될 수 있었다. 제작과정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지만 마지막에 의상과 세트 비용 200만 원이 모자라서 제3금융에서 대출까지 받아야 했다. 정말이지 겁 없는 신진으로, 창작자로서의 집중력과 추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시키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 정신만은 높이 살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공연 후에 칭찬을 많이 받아서 궁극적으로는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안무가로서 역량을 차근차근 인정받아가며

 

2010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중에서 아트프론티어 1기로 선정되어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이듬해 스페인 ‘Bilbao Act Festival’에서 〈On the Road〉란 작품으로 동양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받았다. 이어서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적인 공연예술을 관람하였으며 비엔나 임펄스탄츠로 가서 워크숍에 참여하곤 했다. 거기서 관계자들에게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냐는 권유를 받곤 해서 놀라기도 했다. 당시에는 외국에서 활동하기보다 이번의 경험들을 잘 간직하여 자신의 안무력을 다져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2011년 크리틱스초이스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고맙습니다>는 정보경의 초기 대표작으로 명명될 수 있다. 

 

<고맙습니다>(2011)ⓒ김두호

 

<고맙습니다>에서 정보경은 자기만의 춤의 매력을 확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자유롭고 리드미컬한 동작성은 현대춤적인 형태지만 대지친화적인 낮은 무게중심이나 순환적이고 밀도 높은 호흡은 한국춤의 원리다. 두 춤의 경계 짓기가 무의미할 정도로 장점만을 잘 융해한 움직임은 세련되면서도 흥겨운 분위기를 이끈다. 젊은 감각의 한국적 컨템포러리댄스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군무뿐만 아니다. 여성적인 부드러움 속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응집해 놓은 정보경의 독무 또한 중간 부분을 제대로 받쳐주었다. 이와 더불어 기타, 장구, 북, 드럼 등 동서양의 악기를 섞은 연주는 동서양 음악의 장점을 융해함으로써 춤과 같은 특질을 보인다. 생동감 넘치는 연주에 조금도 함몰되지 않은 춤적 내공은 고스란히 안무적 역량의 투영이다. 지금 춤추는 자신을 있게 한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담은 제목은 사실상 궤도에 오른 자신의 춤의 내공에 대한 자신감의 표명이기도 하다. (…) <고맙습니다>는 정보경의 젊은 날을 대표하는 레퍼토리에 올릴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춤> 2011년 8월호

이후 〈One day〉(2012), 〈Bird’s Eye View〉(총괄안무 임학선, 2014), <각시>(2016) 등 꾸준하게 발표하면서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예열의 과정을 거쳤다. 

 

〈ONE,源〉(2019)ⓒ김정환

 

중요한 창작자로 자리잡게 한 대표작 ONE,

 

정보경은 2012년부터 모교였던 선화예술고등학교에서 9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보람은 있었지만 자기만의 창작 작업에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예고 강사 활동을 마무리하고 2019년 한국무용제전에서 〈ONE, 源〉이라는 대단히 의미있고 인상적인 신작을 선보였다. 

 

〈ONE, 源〉에서 정보경은 거의 탈(脫)한국적인 안무와 음악성을 확인시켰다. 우선 춤사위에 있어서 한국무용의 원리를 담은 호흡, 디딤, 어름을 바탕으로 하되 보다 자유롭고 감각적으로 확장된 동작성을 보이고 있다. 열네 명으로 이루어진 군무의 구도는 끊임없이 변주하면서도 이를 한데 아우르는 틀과 패턴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건반, 드럼, 기타, 콘트라베이스, 장구, 꽹과리, 정주, 구음 등을 활용하여 양악과 국악을 융해한 연주는 작품의 흥, 멋, 쾌를 돋우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여기서 정보경의 음악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선율의 메인과 서브를 분리하거나 각 악기마다의 소리를 분리하여 군무의 다채로운 짜임새에 반영하는 방식은 우리나라 창작자로서 매우 드문 경우다.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완급이나 고조까지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정교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조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현재 컨템포러리댄스의 세계적인 안무가들이 실현하고 있는 방식과도 매우 닮아 있다. 정보경의 대표작으로 명명될 수 있으며 그녀를 대단히 중요한 창작자로 거론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다.  <춤> 2019년 5월

컨템포러리한 한국창작무용의 선두주자로 거론될 수 있는 정보경이 몇 년간의 상대적으로 더딘 창작활동을 딛고 적절한 타이밍에 〈ONE, 源〉을 발표함으로써 창작자로서의 인지도는 한두 단계 상승하였다. 그 연결 선상에서 2020년 대표 안무가들의 주요 무대 중 하나인 아르코파트너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발표할 수 있었다. 

 

<다가오는 것들>(2020)ⓒ옥상훈

 

정보경의 예술적 특질

 

정보경은 컨템포러리한 한국창작무용을 본격화한 안무가로 명명될 수 있는데, 그 예술적 특질을 몇 가지 짚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춤사위에 있어서 한국무용의 원리를 담은 호흡, 디딤, 어름을 바탕으로 하되 보다 자유롭고 감각적으로 확장된 동작성을 보인다. 군무의 구도는 끊임없이 변주하면서도 이를 한데 아우르는 틀과 패턴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품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완급이나 고조까지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정교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조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춤사위와 구도 그리고 흐름을 직조하듯 안무하는 창작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연스러운 여성주의적 뉘앙스를 함양하고 있다. 여성적인 부드러움 속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응집해 놓은 정보경의 독무에서 이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페미니즘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 여성 창작자로서 고유한 움직임을 찾아가고자 하는 탐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정보경은 ‘남녀의 움직임에 있어 에너지의 차이, 몸의 흐름, 감각의 결 등을 탐구하여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제작 여건으로 말미암아 여성 창작자들의 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그녀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다가오는 것들>(2020)ⓒ옥상훈

 

음악성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단순히 음악에 움직임을 잘 맞춘다는 개념을 넘어서 주요한 요소마다 춤과 음악은 한 몸처럼 엮어져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녀 스스로 ‘이 장면에는 어떤 악기로 어떤 멜로디가 들어가야 할지’에 대해 작곡가나 뮤지션과 교류할 정도가 되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본다. 우리의 장단과 재지(jazzy)한 리듬을 한데 머금은 음악이 직조한 듯한 춤과 더할 나위 없이 일체감을 보일 때 결정적 장면이 새겨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보경은 컨템포러리한 한국창작무용을 통해 보편성과 독자성이라는 우리 춤의 세계화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보편성이라고 하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창작 경향인 컨템포러리댄스에 동참하여 추구하는 것이고, 독자성이라고 하면 우리 무용가가 활용할 수 있는 한국춤의 고유한 원리적 본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2011년 첫 해외 진출 당시 무용 관계자들이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느냐고 타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던 ‘Summer Nostos Festival’의 개막 무대에 〈ONE, 源〉이 초청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신진의 가능성이 아니라 창작 레퍼토리로 인정받아 초청받은 것이라 대단히 좋은 기회인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축제 자체가 취소되어 아쉬울 수밖에 없다. 

 

〈now and then〉(2021)ⓒ강낙현

 

창작자로서 정보경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진중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재능과 노력 그리고 고난이 버무려진 춤 인생으로부터 얻어진 값진 자양분이 아닌가 한다. 마흔 줄에 들어선 정보경은 창작자로서 전성기를 향해가고 있다. 롤러코스터처럼 굴곡 많은 창작 현장에서 꾸준한 활동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몇 안 되는 여성 무용가로서 앞으로의 발자취도 지켜볼 만하다.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