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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애정을 무대로 옮기는 스토리텔러 - 지우영

 

한국 발레계에서 관용구처럼 쓰이는 문장이 있다. ‘안무가가 없다’라거나 ‘안무가를 길러내야 한다’가 그것이다.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썼지만 둘은 의미상 같은 문장이며 이 문장이 통용되는 배경을 발레계가 아닌 무용계 전체로 확장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테크닉이 뛰어난 무용수들이 다수 배출되어 국제무용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해외 발레단에 입단해 주역으로 성장하는 등 무용수들의 성장세는 매우 가파르지만 무용수들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는 여전히 클래식발레에 한정되어 있다. 발레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곤 하지만 이 역시 클래식발레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고, 무용수들이 레퍼토리의 폭을 넓히고 보다 큰 무대에서 춤추고 싶다는 소망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배경에도 클래식발레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는 무대 환경이 있다.

 

이 같은 클래식발레 지배적인 분위기는 민간에서 발레단체를 운영하며 부딪치는 문제들인 자금난이나 무용수 수급 난항 외에도 안무가들의 창작 활동을 위축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동한다. 신작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신작을 레퍼토리로 정착시켜 꾸준히 공연하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2003년 댄스시어터 샤하르를 창단해 20여 년 가까이 공연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는 안무가 지우영의 행보는 창작발레의 척박한 토양 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하노버로 간 기적의 소녀

 

지우영의 무용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첫머리에는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 입상한 아역 배우가 나온다. 아역 배우로 재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조언으로 무용, 피아노, 미술 등 다양한 예술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 무용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몸이 약해 아역 배우 생활을 오래 이어가지는 못하고 딸들의 음악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언니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피아니스트가 된 언니와 달리 지우영과 피아노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예원학교 입시에 실패한 그는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고, 어머니의 오랜 반대 끝에 신체조부에 들어가 다시 무용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체조를 가르치던 교사가 그에게서 발레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선화예고 진학을 권유한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말이 되어서야 무용학원에 등록하고 입시 준비를 시작했으니 예중에서부터 발레를 전공한 동학년생들보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예체능은 물론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의 입시 과정은 수험생들을 규격이 정해진 일정한 틀에 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우영은 학원에서 입시 무용을 속성으로 따라잡던 중학교 시절부터 창작에 대한 관심이 특출난 안무 유망주였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발레를 배우러 온 초등학생들을 무용수 삼아 자신이 안무한 작품에서 춤을 추게 하다 학부모들의 컴플레인을 받기도 했고, 예고에 진학해서도 예중 학생들이 과제로 받은 안무 숙제를 도와준 것이 들통나 교무실로 불려가서도 혼나기보다는 도리어 안무에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받은 일도 있었다.

 

무용을 시작했을 때부터 창작에 이끌려 안무가를 꿈꿨던 지우영이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던 대학 진학에서부터 독일 유학까지의 과정에서 힘이 되어준 것은 어머니와 언니의 존재였다. 선화예고에서 유일하게 이화여대 무용과에 지원할 만큼 기대를 받은 학생이었던 그가 불합격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 그의 무용 전공을 극렬하게 반대하던 어머니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용을 그만두겠다는 그를 적극 설득해 이듬해 수원대 무용과에 진학하도록 권유했다. 


지우영이 막상 대학에서 접한 안무 수업에 실망해 유학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언니는 독일 하노버국립대학을 추천했다. 클래식 전통이 강해 그의 성향에 맞는 데다 언니가 그곳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이미 유학 생활을 하고 있어 적응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이유에서였다. 하노버의 친구들은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에게 ‘기적의 소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상태로 하노버로 간 그는 5학기부터 8학기까지 2년 과정만 마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1학년이 수강하는 1학기 과정부터 학교에 개설된 모든 강좌에 다 참여했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헤르미온느가 타임터너를 사용해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며 교내 모든 수업을 들은 것을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다.)


열정을 불태웠던 독일 생활의 마무리는 순탄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 후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졸업 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었고, 지우영의 졸업을 즈음해 학교에서는 입학할 당시 약속한 커리큘럼 이수 외에 이론 한 과목을 일 년 동안 추가로 수강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귀국과 결혼을 서두르고 있던 지우영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학교 측과 줄다리기 끝에 그는 수료 후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귀국하고 나서 몇 년 뒤 하노버대학에서는 무용과가 폐지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스토리텔링, 휴머니즘, 음악성

 

<한여름밤의 호두까기인형>  


귀국 후 연극 무대에서 잠시 활동하던 지우영은 2003년 첫 안무작 <줄리엣과 줄리엣들>로 발레협회 신인안무가상을 수상하며 안무가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해 댄스시어터 샤하르를 창단해 <어머니>를 창단 공연으로 올리며 단체의 첫 발을 내딛게 되는데, ‘샤하르(shahar)’는 ‘새벽’, ‘빛’, ‘여명’, ‘부지런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다. 샤하르의 의미를 좁게는 무대를 밝히는 조명으로도, 조금 넓게는 공연을 통해 세상에 빛을 전달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지우영의 안무작을 따라가다 보면 채 20년이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스무 편이 넘는 작품을 안무하며 단체의 레퍼토리를 착실히 쌓아온 부지런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할 수 없는 지우영의 안무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꼽는다면 ‘스토리텔링’이라 할 수 있다. <줄리엣과 줄리엣들>(2003)이나 <지젤이 지그프리트를 만났을 때>(2004), <한여름밤의 호두까기인형>(2014)처럼 고전을 재해석하거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2007)나 <사운드 오브 뮤직>(2010)처럼 영화로 익숙한 작품들을 무대로 다시 옮긴다거나, <레 미제라블>(2020)처럼 방대한 원작을 압축해 움직임 중심으로 재구성하거나, <헬렌 켈러>(2016)나 <나이팅게일과 장미>(2020)처럼 실제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등 그가 선보이는 이야기는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그 범위 또한 한계 지을 수 없을 만큼 넓다.

 

고전은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무궁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해석으로 즐거움을 주지만 무용 무대에는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서, 혹은 해석력의 부족으로 그럴듯한 움직임만으로 채워진 평면적인 이야기가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 같은 스토리텔러로서의 안무가 지우영의 존재감은 더욱 독보적인데, 다음과 같은 평단의 반응은 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대한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고전발레에서의 주도적인 전형의 하나는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을 남주인공이 구해내는 것인데 여기서 대본, 연출, 안무를 맡은 지우영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클라라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여전사와 같은 호두까기 인형으로 변모하여 강한 힘을 발휘하게끔 한다. 현 시대의 변화된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힘인 모성애로까지 확장하여 논의될 수 있다.

-심정민, <댄스포럼> 2019년 9월호


원서로 2,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원작이 두 시간여의 무대예술로 옮겨지는 동안 과감한 생략과 스피디한 전개, 풍부한 상징을 통해 몰입도를 높이는 한편 영화적 연출의 묘미를 보여준다. 특히 바리케이트 장면에서 여성 시민군에게 깃발을 쥐어주며 혁명의 주체로 그려낸 것은 남성으로 대표되어온 혁명의 얼굴을 여성으로 바꾼 탁월한 연출이었다. 

-윤단우, <댄스포스트코리아> 2020년 10월호

<레 미제라블>

 


스토리텔러로서 지우영이 보이는 한 특징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고전 속에서 하나의 납작한 전형을 이루고 있는 여성 인물들을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은 아직까지 스토리텔링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여성 인물들을 조형해내는 데 있어서도 경직되어 있는 창작 무대에서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지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격정과 비극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줄리엣이 보이는 다면적인 모습에 집중한 <줄리엣과 줄리엣들>이나, 구원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으로 그려지는 고전발레 속 전형적인 여성상을 전복시킨 <한여름밤의 호두까기인형>, 장발장의 개심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했던 코제트를 작품 후반부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세운 <레 미제라블> 등은 여성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작품들인 한편, 후대의 창작자들이 어떻게 고전에 동시대성을 불어넣는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지우영의 인간에 대한 애정은 사회 문제를 통찰한 작품들에서 더욱 빛난다. 6·25 전쟁의 비극 속 전쟁고아들에 대한 사랑을 다룬 <어머니>(2003)나, 다문화 가정과 장애인의 문제를 가족 뮤지컬 형식 안에 녹여낸 <로봇파파>(2014),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꼽히는 중계동 104번지를 배경으로 한 <104마을의 천사 이야기>(2015), 어린이의 ‘노는 권리’에 주목한 <신 소공녀>(2019) 등은 그의 안무작 가운데서도 휴머니즘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또한 어린 시절 피아노로 음악의 기본기를 다진 지우영에게 클래식 음악은 안무의 주요 요소 중 하나다. 그의 안무작들 가운데 음악극을 표방한 작품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바스티앙>(2012), <이상한 챔버 오케스트라>(2013), <마태수난곡>(2016) 등이 음악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인데, 특히 <마태수난곡>은 세계 최초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어머니>

 

예술이라는 선물

 

예술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지우영에게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선물을 전한다는 의미다. 단체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작품을 레퍼토리화해 자주 공연하며 충성도 높은 관객들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저변을 확대해가는 전략이 주효할 것이나 그가 가는 방향은 정반대다.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기존 작품도 공연할 때마다 일신해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선물’의 영어 단어인 ‘present’에 ‘현재’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지우영의 예술이라는 선물은 현재에 대한 충실함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로봇파파>

 

 

공연에 참여하는 무용수들이나 스태프들에게 방심할 여지를 주지 않기에 원성이 높을 법도 하건만, 공연을 총괄하는 디렉터로서의 지우영에 대한 주변의 애정과 신뢰는 매우 견고하다. 현장에서 어떠한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공연예술이지만 그는 변수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응책을 강구하며, 주변에서 원인을 찾으며 책임 전가를 하지 않고 모든 결과를 자신이 감수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공연단체만이 아닌 현대의 복잡하게 세분화된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가져야 할 이상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감정 소모를 하지 않고 신속하게 해결 국면으로 돌입할 수 있으며 구성원들이 처벌을 두려워하며 위축되어 업무 퍼포먼스를 저하시키지 않고 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기 때문이다. 지우영은 이 같은 태도를 스트레스 관리가 되는 면도 있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 문제 해결에 나서기 때문에 팀워크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되고, 창작자에게는 무엇보다 창의력이 닫히지 않고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말한다. 


<이상한 챔버 오케스트라>


 

댄스시어터 샤하르의 예술감독으로 작품을 만드는 외에 사단법인 DTS행복들고나 대표로 경계선 지능 청소년을 위한 예술대안학교인 예룸예술학교와 예하예술학교를 운영하는 교육자이기도 한 지우영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삐 돌아간다. 그러나 이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가 내일을 바라보며 꾸고 있는 또 다른 꿈은 극장이다. 10명 남짓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무대를 가진 극장에서 젊은 무용수들이 리서치를 하고 연습을 하고 안무를 하고 공연을 하며 자유롭게 무용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작품을 만들어온 안무가답게, 작품 바깥에서 꾸는 꿈을 이야기하는 지우영의 목소리에도 다음 세대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댄스시어터 샤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