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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는 것은 빙하인가, 우리의 시선인가: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MELTING〉

※ 이 글은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블로그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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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7-1 (2026.3.5.) 발행


글_ 한성주

사진제공_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Sang Hoon Ok


‘Melting’이라는 단어는 얼음이 녹는 물리적 현상을 의미하는 동시에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경계가 풀리거나 감정이 누그러지는 상태를 함께 내포한다. 형태가 유지되던 것이 서서히 흐트러지고 서로 분리되어 있던 것들이 경계를 넘어 스며드는 과정이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안무·연출: 백연) 〈MELTING〉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 출발한다. 2025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무용 선정작인 〈MELTING〉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2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선보였다. 빙하의 녹아내림이라는 자연 현상을 모티브로 삼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의 구조를 질문한다. 발레와 마임, 퍼포먼스적 장치, 영상과 조명 등 다양한 무대 요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감각적인 이미지로 확장한다.



공연은 시작 이전부터 관객을 작품 속으로 집중시킨다. 객석 1층 A구역 일부 좌석을 비워두고 그 자리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조형 구조물을 설치한 구성은 공연 공간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한다. 공연 시작 약 5분 전 등장한 얼음 퍼포머는 전기톱으로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전기톱으로 깎여 나간 얼음이 점차 유람선의 형상으로 변형되는 과정은 자연의 물질이 인간의 관광 이미지로 재구성되는 장면처럼 보인다. 빙하의 일부였던 얼음이 유람선이라는 형상을 갖게 되는 순간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보고 감상하는 풍경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변형은 빙하를 장엄한 자연 현상으로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관광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인간의 시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어 등장하는 마임이스트는 얼음을 먹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거나 비석치기와 저글링 같은 동작을 수행하며 얼음을 놀이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이후 그는 폭탄 모양의 얼음을 들고 이를 무용수들에게 넘긴다. 무용수들은 객석 사이에 흩어져 관객과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가 얼음을 서로에게 전달하기 시작한다. 얼음은 마치 놀이처럼 이동하며 무용수들은 ‘얼음땡’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으로 서로를 쫓고 피한다. 이 장면은 겉으로는 놀이처럼 보이지만 그 이미지가 전달하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폭탄처럼 전달되는 얼음은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행위처럼 보이며 결국 파열의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놀이처럼 보이던 장면이 붕괴로 귀결되는 이 구조는 환경 위기와 같은 문제를 사회 속에서 타자에게 전가하는 인간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도 실천을 미루거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려는 우리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의 군무는 일정한 조형적 배열을 유지하다가 서서히 흐트러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무용수들의 신체는 처음에는 서로의 균형을 유지하며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밀도와 방향이 변화하며 균열을 드러낸다. 상체의 흐름이 느슨해지고 무게 중심이 낮아지면서 움직임은 점차 붕괴되는 형태로 전환된다. 이러한 신체의 변화는 빙하가 단순히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이 드러나며 갑작스럽게 붕괴되는 과정과 겹쳐 보인다. 공연 중반부에는 남자 무용수(나정운, 이현섭)의 듀엣 장면이 등장한다. 두 무용수는 망원경이라는 오브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움직임을 이어간다. 망원경을 통해 대상을 확대해 바라보는 행위는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인간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한 무용수가 망원경을 들고 상대를 관찰하지만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그 관계는 점차 뒤바뀐다. 망원경이 서로의 손을 오가며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자의 위치는 더 이상 고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은 인간이 자연을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어온 시선을 흔들며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영상과 조명, 레이저가 결합된 공간은 얼음 동굴을 연상시키는 차갑고 비현실적인 환경을 만들어낸다. 조명은 신체의 윤곽을 강조하며 빙하의 균열을 연상시키는 선들을 무대 위에 형성한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는 작품이 말하는 녹아내림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확장한다. 다만 일부 장면에서는 미디어 영상의 색채 및 패턴과 의상의 패턴이 겹치면서 무용수의 움직임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는 순간도 발생한다. 의상을 좀 더 신체 움직임을 강조하거나 확장하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다면 신체의 조형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ELTING〉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녹아내림’을 하나의 감각적 경험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에 있다. 작품은 빙하의 붕괴를 단순히 재현하기보다 인간이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무대 위에 드러낸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하나의 풍경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을 보며 문득 영화 〈설국열차〉가 떠올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기후 재앙 이후 얼어붙은 세계 속에서 인간 사회의 구조와 책임의 문제를 열차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드러냈다면, 〈MELTING〉은 빙하가 녹아내리는 풍경 속에서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 시선의 한계를 무대 위에서 드러낸다. 두 작품 모두 자연의 변화가 단순한 환경 현상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조와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MELTING〉이 보여주는 ‘녹아내림’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과 사회의 구조,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동시에 흔들리는 순간을 가리킨다. 얼음이 깎여 유람선의 형상이 되는 장면에서 시작해 폭탄처럼 전달되는 얼음의 파열에 이르기까지 작품은 녹아내림의 아름다움과 그 뒤에 잠재한 붕괴의 순간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더 이상 풍경을 바라보는 외부의 존재로 머물 수 없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자연의 풍경은 어쩌면 이미 붕괴가 시작된 세계의 표면일지도 모른다. 〈MELTING〉은 바로 그 사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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