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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8-2 (2026.4.20.) 발행
글_ 한성주(본지 에디터)
사진제공_ 18th ARKO SELECTION / ⓒSang Hoon Ok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어른’이라는 가면을 쓴다. 하고 싶은 말은 삼키고, 표정은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율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일터로 향한다. 모므로살롱의 신작 〈성인물: Unspoken Duties〉(안무 이가영, 연출 이가영·안겸)는 초능력 없이 묵묵히 오늘을 견뎌내는 보통 어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2026년 창작산실 무용 부문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이번 무대는 50분이라는 시간 동안 감각적인 공간 구조와 절제된 신체 언어를 통해 우리 시대 성인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인간의 감정을 몸짓과 이미지로 치환하며 일상과 예술의 접점을 고민해온 모므로살롱은 이번에도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무대로 끌어올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무대 위 일곱 개의 투명한 프레임으로 나뉜 컨테이너 박스 안, 긴 머리 가발과 연구원 가운을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맨 무용수들이 마네킹처럼 서 있다. 관객이 입장할 때부터 요지부동인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전시된 마네킹처럼 낯설게 느껴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딱딱한 침묵은 어딘가 익숙하다. 타인의 시선 속에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출근길 혹은 사무실 등에서의 경직된 모습이 그 투명한 유리 벽 너머에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공연 전개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스팸(SPAM)’은 단순한 소품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공연 전 관객들에게 배부된 홍보용 스티커에 이미지가 담겨 있었을 만큼,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소재로 다가온다. 흥미로운 지점은 무용수들이 스팸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들은 스팸을 갓 지은 밥에 곁들이는 반찬이 아니라, 마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들이키는 음료처럼 빨아 마신다.
이 장면은 앤디 워홀의 대표작인 <캠벨 수프 캔>을 떠올리게 한다. 워홀이 평범한 식료품을 반복적으로 배열해 일상의 단면을 예술로 보여주었듯 안무가 또한 스팸이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일상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무용수들이 스팸을 음료처럼 마시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식사가 어느덧 의미 없는 반복적 소비로 변해버린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맛을 느끼기보다 습관적으로 하루를 채워 넣으며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의 고단한 모습과 닮아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무대를 넓게 쓰기보다 자로 잰 듯한 간격을 유지하며 절도 있게 끊어지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정교하게 조립된 레고 인형을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변주는 무대 중앙의 레버 장치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들려오는 소리는 차가운 기계음이 아니라 뜻밖에도 평화로운 카페 음악이다. 무용수들은 커피잔을 든 채 그 달콤한 선율에 맞춰 움직이지만 그들의 몸짓은 여전히 규격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평온한 일상의 상징인 커피와 음악마저도 결국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소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태엽이 감겨야만 흘러나오는 오르골의 멜로디처럼 우리가 누리는 짧은 휴식조차 거대 구조가 허용한 정교한 배급 시스템의 일부는 아닌지 서늘한 질문을 던지는 대목이다.
무용수들은 연구원, 회사원, 슈퍼맨으로 쉼 없이 모습을 바꾼다. 이러한 연속적인 변신은 우리가 가진 자아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가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옷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기보다 사회가 내몸에 붙여놓은 이름표인 셈이다. 이토록 통제된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컨테이너 밖에 있는 배달 기사 복장의 인물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모두가 효율과 속도를 지키며 매뉴얼대로 움직일 때, 그는 느릿하게 당근을 심는다. 그의 행위는 쉼 없이 돌아가는 시스템의 시간을 잠시 중지시키고 누군가를 돌보고 무언가를 길러내는 본질적인 느린 시간을 무대 위로 불러들인다.
암전 이후, 무대에는 조교 복장을 한 무용수들이 등장해 군대처럼 딱딱하게 맞춰진 동작을 수행한다. 머리 위로는 몸 안을 엑스레이처럼 촬영한 CT 영상이 흐르는데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감정까지 시스템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묘한 압박감을 준다. 하지만 무대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화면은 무용수들의 미세한 눈빛과 작은 떨림까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관객은 화면 속 무용수의 얼굴에서 직장이나 가정에서 애써 감정을 누르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차가운 기계처럼 움직이는 무용수들에게서 인간적인 흔들림을 포착하는 순간, 박스 안의 그들과 박스 밖의 우리가 같이 버텨내고 있다는 깊은 유대감이 느껴진다.
공연의 후반부, 붉은 박스 안에서 무용수(안겸)가 보여주는 일상적인 행위들인 샤워, 도넛 먹기, 흡연 등은 마치 교도소의 수감자가 보내는 고독한 시간처럼 그려진다. 누군가 엿듣는 전화 통화와 계속되는 촬영은 사적인 순간조차 타인을 의식해야 하는 현대인의 피로감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선의 감옥 속에서 우리는 어느덧 스스로를 검열하며 감추는 법에 익숙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감정을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 모른다.
이번 신작은 공간이 주는 시각적인 미학과 이를 치밀하게 활용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지점이 많다. 모므로살롱의 특유의 움직임이 전작들의 문법과 유사한 결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관객에 따라 기시감으로 다가올 여지가 있으나 단순한 정체로 치부하기보다 이들만의 확고한 시그니처 스타일로 보여진다.
<성인물(Unspoken Duties)>은 어른의 삶을 거창하게 영웅화하지 않는다. 매일의 책임을 감내하며 묵묵히 하루를 마치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고요한 위로이다.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 반복이 사실은 얼마나 치열한 버팀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견뎌낸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성인’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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