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에 만났던 청명한 가을날의 춤 풍경 - 서울아트마켓과 무용역사기록학회 초청 해외 인사들과 동행했던 행사 참관기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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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일기를 쓴다면 청명한 가을하늘로 빛났던 10월 4일(화)의 페이지는 아마도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은 참 운수 좋은 날이다…” 이날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하는 2016 서울아트마켓(PAMS)가 개막한 날이다. 이번 PAMS에는 예년 행사보다 더 많은 수의 해외 기획자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여러 관계자들이 내한했다. PAMS가 열린 닷새간, 서울 전역에는 공급과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실로 엄청난 수의 공연과 행사들이 열렸다. 무용계에는 서울세계무용축제와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서울댄스콜렉션이 대표적이며, 여기에 무용역사기록학회(공동대표: 김운미, 조기숙)가 “최승희 춤의 국제성과 한국춤의 세계화”를 주제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글로벌한 행사들이 즐비했다. 그야말로 10월 초순의 서울은 다국적 문화촌을 이룬 것처럼 이국적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PAMS에는 “Journey to Korean Music”라는 독특한 부대행사가 있다. 올해 “Journey to Korean Music”의 공모 작의 하나였던 은 무용인류학자 최해리가 기획과 진행을 맡아 촘촘하게 진행한, 아주 의미있는 프로젝트로 기억될 만하다. “Journey to Korean Music”은 해외 진출을 열망하는 국악 공연단체에 해외 중요 마케터와 미디어 관계자들 앞에서 쇼케이스 형태로 자신들의 음악을 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지난 9년 동안 실제로 수많은 국악팀들이 30여개국에 진출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낸 기획 프로그램이다. 금년에 처음으로 무용분야에 기회의 빗장이 열려 제작감독 최해리와 무용공연 전문기획사 MCT(대표: 전홍기)가 협력하여 4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창덕궁 앞에 개원한 돈화문국악당에서 진행하였다. 은 불교의식무용, 궁중무용, 신무용, 그리고 한국창작춤의 전문가들이 현장 연주와 함께 진중하고 엄숙하며 때로는 친숙한 분위기로 소담스레 진행되었다.
공연의 1부는 영어 인사말을 시작으로 최해리의 다정다감한 해설 아래 동희스님의 <법고무>로 서막을 알렸다. <법고무>는 불교의식 때 연행되는 작법의 하나로 구도의 마음을 담고 있는 만큼 범패음악과 더불어 고풍스런 한옥 분위기에 취한 70여명의 해외 인사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김영숙 예술감독이 이끄는 정재연구회의 <아박무>가 공연되었는데, 이 춤은 소도구 아박을 장단에 맞추어 치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윽고 불교의식무용 <바라춤>이 동희스님에 의해 다시 추어졌다. 양 손에 큰 바라를 들고 사악을 물리치고 마음을 정화하려는 뜻에서 불가에서 추어진다는 이 춤은 스님이 두른 붉디붉은 가사와 함께 오전 무렵의 뜨악한 가을 햇살이 바라에 투영되어 돈화문국악당의 앞뜰을 신성한 장소로 채색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주최 측에서 정성껏 준비한 점식식사를 마친 후에 실내 공간인 국악당으로 장소를 옮겨 공연이 계속 진행되었다. 정악 연주로 장엄하게 시작된 2부의 공연은 궁중의 의식 음악과 춤인 <종묘제례악>으로 출발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세계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야말로 조선시대가 전하는 우리의 찬란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재연구회는 총 11곡 중 4곡의 연주곡과 일무(지도: 이미주)를 발췌하여 공연하였으며 객석으로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이윽고 올해 90수를 맞이한 원로무용가 김백봉 선생의 원작 <화관무>가 둘째 따님인 안병헌에 의해 단아한 독무로 추어졌다. 공연의 대미는 YMAP의 대표인 안무가 김효진이 추는 컨템포러리댄스가 장식했다. 최근 김효진은 미디어아트를 근간으로 한 작품 <자유부인>과 덕수궁과 경복궁의 미디어파사드를 연출하는 등 융복합 예술장르의 선두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날 김효진은 전통음악의 재해석에 포커스를 두고 창작한 신작을 선보였다. 궁중음악의 백미인 <수제천>을 재해석한 <하늘을 닮은 춤>에서 김효진은 탄탄한 기본기로 다져진 한국춤의 호흡과 날렵한 춤사위로 무대공간을 수놓았다. 공연이 종료되고 질의응답 시간에는 질문 공세가 이어졌는데, 이는 한국춤에 대한 해외 인사들의 높은 호응과 궁금증을 대변하기도 했다.
쇼케이스 가 끝나고 최해리 제작감독은 무용 인사들만 따로 모아 근처에 소재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 분원으로 인도하였다. 8월 17일부터 10월 23일까지 진행된 국립현대무용단(예술감독: 안애순)의 <2016 다원예술 프로젝트: 예기치 않은>을 참관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일행은 프로젝트를 담당한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조지은, 양철모, 김을 등 네 명의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과 이웃 공간에 전시된 한국 공예작가들의 도자기와 그릇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서울의 도심에 위치한 미술관의 규모와 현대적 감각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불행히도 이날은 <예기치 않은>과 연계된 퍼포먼스가 없는 날이었다. 따라서 로비의 영상을 통해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안무자 김보라, 황수현, 김정선, 이재영의 연습과정과 인터뷰를 감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미술관 투어가 끝나고 일행은 몇 대의 차량을 나눠 타고 반포대교 인근에 위치한 현대무용단 안은미컴퍼니의 스튜디오로 움직였다. 하와이대학의 주디 반 자일(Judy Van Zile) 교수를 비롯하여 10여명의 해외 인사들을 반갑게 맞이한 이른바 ‘국보급 안무가’ 안은미. 그녀는 예의 키치풍의 의상을 입고 명랑한 웃음과 하이 톤의 수다로 강행군에 지친 인사들의 기분을 순식간에 반전시켰다. 현재 유럽 공연무대에서 ‘안은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지난 모습들이 담긴 사진과 공연의 영상을 프로젝션하며 특유의 액션과 허스키한 보이스의 영어로 설명하며 일사천리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였다. 또한 안은미컴퍼니의 스타무용수들인 김혜경, 정영민, 김기범, 박시한 등 6명의 무용수들이 약 10분에 걸쳐 그녀의 대표작 <바리>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중 하이라이트 장면을 공연하여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어서 안무가 박순호의 브래시트컴퍼니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 진행되었다. 박순호의 해외투어 매니저가 차분한 영어로 진행한 프리젠테이션에는 여타의 영상자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수차례에 걸쳐 해외진출에 성공한 터이라 영국, 중국, 대만의 인사들이 바로 초청 의사를 타진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두 단체의 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해외 인사들은 안은미에 대해서 “한국에 이런 기상천외한 안무가가 존재한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는지 일찍 알지 못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그중 두어 명은 최해리 제작감독에게 ‘비싼 가격’이 매겨졌을 안은미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초청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은근히 물어보기도 했다.
비공개 프리젠테이션이 있은 후에 몇몇 인사들은 오후 6시에 시작하는 PAMS의 개막식으로 바삐 이동하고, 남은 사람들은 예술의전당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정겨운 저녁식사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오후 8시에 오페라극장 CJ토월극장에서 제19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국내초청작인 모던테이블(예술감독: 김재덕)의 <속도>를 감상했다. 안무가 김재덕은 약 1시간에 걸쳐 “빠르게, 느리게, 보통으로”라는 세 가지 속도감을 무예적인 동작의 베리에이션으로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 김재덕은 10명의 남성 무용수들이 리듬의 속도에 따라 동일하게 그러면서도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도록 패턴을 만들었고, 이 패턴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그의 패기만만한 감각이 이방인들의 눈에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었는지 일견 궁금해진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밤이 되자 가을날에 마주했던 일련의 춤풍경들이 마치 꿈결 같이 몽롱하고 다소 나른한 분위기로 다가오기에 이르렀다. 전통춤 쇼케이스, 미술관 투어, 컨템포러리댄스의 프리젠테이션과 공연이 숨 가쁘게 이어진 하루였으니 어쩌면 시차적응중인 해외 인사들에게는 행복하고도 노곤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진한 손님으로 예우 받으며 누린 문화적 호사였기에 그들의 일기장에는 분명 오늘은 ‘운수 좋은 날’로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한국을 찾은 해외 인사들에게 우리의 전통예술과 춤문화를 체험케 하려는 몇 사람의 숨은 열정과 실천들이 진정성 있게 빛나는 현장을 필자는 운 좋게, 그리고 마음 설레며 온 나절을 지켜보는 행운의 시간을 가졌다. 지면을 빌어 1세대 공연기획자로서 이번 행사를 주최 혹은 후원해 준 담당자들과 진행자들 모두에게 온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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