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은 미국의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가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을 설파해서 유명해진 ‘기업가 정신’을 말한다. 『철학으로 본 앙트러프러너십』의 저자 전인수 홍익대 교수가 앙트러프러너십을 “우리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사상”이라고 강조하며 번역어를 채택하지 않았기에 이를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앙트러프러너십으로 유명한 기업인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찾기 어렵다. 그런데 기업인 한 명이 오래전부터 메세나를 통해 앙트러프러너십을 실천하고 있었다. LIG문화재단의 구자훈 이사장이다. 그는 우리나라 메세나에서 가장 소외받는 무용을 30년 이상 후원해 왔고, 예술에서의 혁신과 창조를 강조하며 여러 지역에 LIG소극장을 세워 컨템포러리 공연을 전도했던 인물이다. 구자훈 이사장은 작년 말에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로부터 ‘제4회 아름다운 무용인상’의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아름다운 무용인상’은 무용계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무용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비무용인의 수상은 처음 있는 일인데, 재단측에 따르면 “구자훈 이사장이 오랫동안 무용계를 후원해 왔고, 얼마 전에 국립현대무용단의 이사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기에 그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2015년에 LIG손해보험이 KB금융그룹에 매각되면서 산하 기관인 LIG소극장들이 문을 닫았다. 메세나 활동에 휴지기를 갖고 있는 구자훈 이사장에게 무용후원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과 기업가 정신을 들어보고자 인터뷰를 요청했다. 뜻밖에도 흔쾌히 요청에 응했지만 가족들이 있는 뉴욕, 싱가포르, 홍콩 등 해외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 인터뷰 시간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인터뷰는 그가 한국에 잠시 귀국했던 틈을 이용해서 이루어졌다.
- 일시: 2017년 1월 18일(수) 오전 11시 30분
- 장소: 한남동 코로비아 1층
- 인터뷰: 본지 편집주간 최해리
- 동석: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 상임이사 장승헌
1시간을 예정했던 구자훈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점심까지 먹어가며 무려 4시간가량 진행되었다. 인터뷰에 앞서 그는 무용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에서부터 미국 유학 시절과 뉴욕 지사에 근무했을 당시에 만났던 무용인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의 생생한 기억력과 구수한 내레이션은 마치 우디 알랜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60, 70년대의 뉴욕 거리를 거닐게 만들었다. 그가 들려준 무용계 스토리는 그야말로 한국춤계의 이면사(裏面史)였다. 그가 만났던 무용가들과 수많은 일화는 다음 기회에 구술사로 남겨줄 것을 요청하며 본격 인터뷰로 진입했다.
Q. 우리나라 최고의 무용후원자이신 이사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작년 말에 재단법인 전문무용수지원센터로부터 특별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소회가 어떤지요?
A. 30년 이상을 알고 지낸 분야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이 쑥스러웠다. 무용후원의 첫 출발은 김현자춤아카데미였다. 김현자춤아카데미에 대한 발상은 1986년에 <춤>지에서 김현자, 조동화, 중앙대 교수이자 연극평론가였던 한 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나왔다. 연극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안무가 양성을 거론하게 되었다. 먼저 조동화가 “외국에는 스타가 있는데 한국에는 왜 없는가?”라고 했고, 김현자는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 장르를 벗어나 창작을 지원해야 하고, 안무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모두가 동조하였고, 조동화는 김현자에게 “본인의 이름을 붙인 아카데미를 열라”고 권유했다. 김현자는 “서양의 안무법을 한국적인 춤사위와 접목시키겠다”는 등 구체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안무가를 양성하려면 여러 장르의 지식을 광범위하게 습득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얼마 후에 김현자춤아카데미가 가시화되었는데, 문을 열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교육생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론 강의를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운영했다. 교육생은 실기 테크닉과 본인의 생각을 물어보는 심사를 통해 선발했다. 강사진에는 김채현, 김태원 등 춤평론가들을 총망라했다. 여러모로 혁신을 꾀하다보니 무용계의 시선이 배타적인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이 교차했다. 1기생에 강미선, 김삼진, 성기숙, 최데레사(본명 최서희)가 있었는데, 김삼진과 최데레사는 서울무용제에 출전하는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고, 또 성과도 많았다.
Q. 그러면 김현자춤아카데미의 지원이 첫 후원사업이었나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A. 조동화 선생의 권유로 김현자춤아카데미를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춤>지에 회사 광고를 넣기도 하고. 아카데미의 후원에는 당시 젊은 임원들과 지인 변호사들이 참여해서 매우 활기찼었다. 이 후원은 4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김현자 선생이 창작기반을 럭키한국창작무용단(이하 무용단, 1986년 창단)으로 옮기면서 유명무실해졌다. 나는 무용단을 사이드에서 지원했다.
Q. 이사장님의 후원활동이 럭키한국창작무용단에서 출발했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A. 무용단은 주식회사 럭키에서 후원한 것이다. 기업무용단이라는 점과 상임안무자였던 김현자와 정재만의 창작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등 무용단이 꽤 주목을 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단원들이 노조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디션을 시도하자 노조를 결성했다. 당시는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이행하던 시기였고,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노조활동이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그들은 오디션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 광고를 찍는 것도 거부했다. 후원을 위해서는 기업 광고가 필요한데, 자존심 문제라며 싫다고 했다. 무용단은 회사의 생산성과 무관한 단체이므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기업에서 시작했던 첫 무용단이었고, 잘해서 여러 기업으로 확산되었더라면 무용예술이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풍토가 여물지 못했다.
Q. 무용후원을 시작하면서 어떤 롤모델을 갖고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뉴욕시티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을 창단했던 링컨 컬스타인(Licoln Kirstein)이라든지, 스웨덴국립무용박물관을 건립했던 롤프 드 마레(Rolf de Maré)라든지요.
A. 특별한 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예술에는 여러 분야가 있는데 지원은 많이 받지 못하면서 고생은 가장 많이 하는 곳이 무용이다. 무용은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음악, 의상, 조명이 필요하고, 무용수들은 연기도 하고 춤도 춰야 한다. 무용은 엄청난 노력과 코스트가 필요한데, 또 많은 코스트에 비해 아웃컴은 없는 곳이다. 이 점이 눈에 들어왔다. 무용분야가 가장 힘들어 보였고, 도와주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는 이런 인식이 부족하다. 무용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해시켜야 한다.
Q. 기업인들에게 메세나는 왜 필요한지, 이사장님은 어떻게 메세나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기업과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제품을 만드는 데에도 예술적 감성이 필요하다. 제품의 제작을 일종의 공업예술로 보아야 한다. 기업에 소속된 중역급 이상의 CEO들이라면 예술적 감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기업인들은 예술가들을 부러워하고, 예술에 대한 호기심도 많다. 기업의 메세나는 기업인들과 예술인들의 가교 역할을 한다. 여러 회사들이 후원하는 뮌헨의 섬머뮤직페스티벌이 좋은 예인 것 같다. 이 페스티벌은 공연에 앞서 로비에서 칵테일파티를 연다. 후원사마다 지정 테이블이 있고, 관객들은 자신들의 회사 테이블을 중심으로 소담을 나눈다. 객석에도 후원사마다 지정 좌석라인이 있다. 그날 관객의 대부분은 회사의 중역들이었는데, 정장을 차려입고 음악에 심취한 그들의 세련된 모습에 위축감이 들 정도였다. 이들에게 더 놀랐던 것은 공연이 11시에 끝났는데, 그때부터 새벽 2시까지 공연자들을 위해 만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공연자들이 만찬장을 돌면서 인사를 하는데, 예를 다해 대우하는 모습이 무척 감명 깊었다. 우리도 이런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책임을 가진 리더들이라면 반드시 예술적 소양을 겸비해야 한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분야까지 침투하며, 모든 분야를 좋아지게 만드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공연을 많이 볼 수 있도록 하고, 공연장을 자주 찾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무용가들도 기업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무용이 친숙하지 않은 현실에서 기업인들은 무용공연을 볼 기회도 없고, 처음부터 재미날 수도 없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계속 보고, 계속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기업의 무용후원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Q. 후원의 주된 관심이 창작 혹은 컨템포러리 예술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장님의 예술적 취향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A. 동시대성에 관심이 많고, 동시대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컨템포러리를 선호한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 또한 달라진다. 외모, 인테리어, 건축 등이 대표적이다. 예술을 통해 이런 것을 많이 느끼도록 해줘야 한다. 컨템포러리 공연예술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광경들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100년 전에 파격적으로 간주되던 최승희의 춤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을 보면 무용에서도 컨템포러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 춤도 변해야 한다. 예술은 창조와 혁신을 거듭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용계는 변화의 속도가 무척 느리다.
Q. 무용후원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A. 주변 사람들이 무용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 어렵다. 후원하는 공연이 열릴 때면 지인들을 많이 초대한다. 그런데 무용을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공연 전의 리허설이나 공연 후의 리셉션에도 오도록 한다. 그들의 이해도 돕고 무용가들과 친해져서 공연장을 자주 찾도록 하기 위한 일환이지만, 이를 회피하는 무용가들이 많다. 의외로 무용가들이 수줍음도 많고 적극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극인들이라면 이런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연극인들은 일심동체로 판을 잘 벌인다. 그런데 무용계에는 구심점이 없고, 하나로 뭉치는 일도 없다. 유진룡 장관 시절에 무용전용극장이 추진되었고, 실제로 대학로의 한 극장이 전용극장으로 거론되다가 실패했다. 연극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고, 일부 무용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무용인들이 반대한 이유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전용극장화가 싫고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용계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앞으로 무용계 발전을 위한 일에는 무용인들이 다 같이 노력해주면 좋겠다.
Q. 앞으로의 무용후원은 어디에 중점을 두실 것인지요?
A. 아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회장을 자주 찾는다. 한번은 금호재단에서 2억 원어치의 티켓을 구매해서 배포한 적이 있는데, 95퍼센트가 왔다고 한다. 그리고 베를린교향악단의 말러 특집 연주회에 갔더니 말러에 심취한 관객들이 많아서 놀라웠다. 무용공연에서도 이런 광경을 보고 싶다. 그래서 무용공연장에 관객들을 어떻게 잘 채워 넣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작년에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공연을 보기 위해 프랑스의 샤이오극장을 방문했는데, 그곳 관계자로부터 상주안무자가 신작을 올리면 최소 2주간 2천석의 객석이 매진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웠다. 우리도 그런 안무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용공연을 최대 이틀로 끝내는 풍토도 변해야 한다. 이제는 고정관객과 장기공연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과거에 비해 무용에 심취한 관객들이 많아진 것 같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Q. 무용가들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입니까?
A. 과거에 비해 무용수들의 기량과 무용스타일은 정말 많이 발전했다. 그런데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여전하다. 예술교육이 도제시스템으로 이루어지니 없어질 수는 없겠으나 어느 분야보다도 심하다. 이 점이 무용계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 해외 무용계를 보면 무용교육의 중심은 컨서버토리에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무용교육은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다수의 무용가들이 대학교수를 하고 싶어 한다. 대학에 있어야지 고정 월급도 있고, 조교와 무용수를 쓸 수 있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현대무용의 본질이 무엇인가? 심오하고 자유로운 것 아닌가. 눈치를 보고 틀에 매인 풍토에서 제대로 된 창작이 나오겠는가. 정말 달라져야 한다. 아류에서 벗어나서 큰 틀을 봐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발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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