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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묵으로 그리는 춤> 10주년 공연을 앞둔 순헌무용단 차수정 예술감독

무대 구현도 © 순헌무용단

 

순헌무용단이 ‘필묵으로 그리는 춤’ 10주년 공연을 런스루로 연습한다고 해서 4월 3일 일요일 오후 3시에 숙명여대를 찾아갔다. 30여 명의 무용수들이 한차례의 런스루를 끝내고 흐트러짐 없이 두 번째 런스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런스루는 이영일 연출가의 디렉션 아래 현장 리허설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이 공연은 ‘조선의 왕비’로 분한 차수정 예술감독의 차분한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내레이션이 끝나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기원 전야제가 ‘지신밟기’로 집약해서 아름답게 펼쳐진다. 공연무대로 상상력을 확장해 보면 무대 바닥에는 전통문양으로 꾸며진 9미터의 대형 카펫이 깔려 있고, 무대 뒤편에는 미디어 영상 판이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 화가가 춤과 함께 실시간으로 그림을 채워갈 것이다. 그리고 국악 반주자 9명은 역동적인 연주로 춤의 에너지를 상승시킬 것이다. 


호화로운 무대에 춤은 부차적인 존재처럼 보일 것 같지만 90분의 공연을 끌고 가는 원동력은 차수정 예술감독의 춤이다. 그녀의 단아한 춤태, 안정적 춤세, 정교한 춤사위는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차 예술감독의 춤에는 전통춤의 핵심미학인 ‘정중동’이 살아 있다. 


우리춤의 전통학습방식이 ‘구전심수’와 ‘의인승계’로, 스승의 춤을 “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부터 연습실에서 춤을 연마했던 스승 고(故) 정재만 교수를 보며 차수정 예술감독이 성장했듯이 순헌무용단의 무용수들은 그들의 스승인 차수정 교수의 춤을 눈으로 배우고 있었다. 


이렇듯 ‘필묵으로 그리는 춤’을 통해 전통춤의 ‘정중동’ 미학을 확인하고, 우리춤의 명인이었던 정재만을 추억하고, 전통춤의 재목들이 미래의 한국춤 무대를 향해 촘촘하게 발돋음해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수작(秀作) 무대의 탄생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다.  

‘필묵으로 그리는 춤’(필.춤.)의 1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순헌무용단의 대표 브랜드라고 하는데 어떤 공연입니까? 

<태평무>, <살풀이춤>, <승무>, <산조춤> 등 기존 전통춤에서 핵심 의미를 재해석하여 춤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스토리텔링으로 엮고 다양한 장치로 스펙터클하게 구성한 무대입니다. 전통춤이 씨뿌리기, 벌레소리, 살아 있는 나비의 등장으로 생태적 시각에서 펼쳐 보이기도 하고, <태평무>,  <소고춤>, <나비 살풀이춤>, <부채산조>, <승무>, <춤의 합주>가 음악과 그림과 함께 융·복합적으로 펼쳐집니다. 

 

‘필.춤.’은 어떤 계기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습니까?

젊은 춤꾼 시절 때 전통춤을 똑같은 프레임의 공연으로 반복하면서 ‘관객들에게 전통춤은 어떤 의미일까?’ ‘이렇게 공연하면 박제된 박물관 공연으로 느끼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전통춤 공연의 주체자가 되면서부터는 관객이 개발되지 않는 데 대한 회의감이 들면서 관객들에게 전통춤에 깃든 깊은 의미를 전달해주고 싶더군요. 그래서 전통춤에 음악적인 풍요로움과 스토리를 가미해서 공연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스승인 정재만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우리 전통춤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던 시절에 나왔기 때문에 땅을 의식하며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많이 강조하셨어요.

  <태평무> 공연 장면

 

특히 <태평무>는 왕과 왕비가 귀한 발로 백성들을 위해 땅을 밟는 행위라고 설명하셨는데, 이렇게 전문 춤꾼만 아는 정보, 그리고 춤에 깃든 의미를 관객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태평무>를 추기 위해서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 보았어요. 백성들을 걱정하던 왕비가 어느 달밤에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기를 하늘에 기도하고 백성과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백성들이 뿌린 씨앗을 지신밟기를 하고 ‘너희가 행복해지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기원을 담아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관객은 단순히 전통적인 <태평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소고춤> 공연 장면

 

<태평무>로 왕비의 소원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면 동네 아낙들이 이웃들의 노동과 삶을 위로하기 위해 달밤 아래에서 소고를 들고 즐겁게 추는 춤으로 이어집니다.

 

<나비 살풀이춤> 공연 장면

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 보낸 백성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연의 일부인 나비를 가지고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춤이 <나비 살풀이춤>입니다. 저는 살풀이춤은 무속으로부터 나온 무서운 춤이 아니라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래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살풀이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비와 함께 춤을 추며 관객이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통해 이승을 떠난 부모님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추억하게 만드는 치유의 춤으로 꾸몄습니다. 3-4마리의 나비가 등장하는데, 나비의 생태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장면이 나타날 것입니다. 

 

 <화조풍월> 공연 장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젊은 여인들이 등장해서 희망적이고 환상적인 장면으로 <화조풍월>을 연출합니다. <화조풍월>은 신사임당의 그림에도 있지만, 나비, 꽃, 나무가 어우러지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잖아요. ‘필.춤.’에서는 아쟁, 거문고, 장구의 선율과 어우러진 춤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펼쳐냅니다. 이 장면에서는 특히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향수에 푹 담근 부채로 춤을 추기 때문에 춤이 끝날 때 즈음에는 객석까지 향기가 전달될 것입니다. 

 

<승무> 공연 장면

 

그다음에는 삶에서 직면하는 어려운 고비를 클라이맥스로 보고 이를 종교적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승무>로 풀어냅니다. 한영숙류의 <승무>가 일반 <승무>와 다른 점은 당악 부분이 있다는 점이죠. 즐거운 당악 가락에 춤을 추면서 인간의 인내를 즐거움으로 승화시킨다는 의미를 보여줍니다. 

  <춤을 위한 합주> 공연 장면

 

원래 ‘필.춤.’은 보름달이 뜨는 추석 때 하던 공연이었어요. 마지막 장면인 <춤을 위한 합주>에서는 보름달이 뜨고 모든 춤꾼이 등장해서 관객들의 만복을 빌어주는 판을 펼칩니다. 피치에 오른 춤과 음악, 완성된 그림이 어우러진 가운데 오색찬란한 꽃잎이 무대 위로 쏟아질 것입니다. 관객들에게 우리춤에 담긴 ‘만복’의 의미를 오색찬란한 무지개빛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죠. 커튼콜에서 모든 출연자가 관객들에게 마음을 다해 절을 합니다. 이는 우리춤에 깃든 겸손함, 예의를 나타냅니다.

 

‘필.춤’을 보고 나면 전통춤은 슬프고 어렵고 무겁고 전문적인 춤이라는 인식이 변화될 것입니다. 전통춤은 우리에게 희망이고, 힘을 주는 귀하고 고급스러운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차수정 예술감독의 <승무> 공연 연습 © 순헌무용단  

 

무용계에서는 순헌무용단의 예술감독보다는 숙명여대 무용과의 ‘차수정’ 교수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숙명여대에 오랫동안 재직하셨던 고 정재만 선생님의 춤맥을 이어가는 전통무용가, 전통춤을 곱게 추는 한국무용가라는 이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현대적 감각의 창작춤을 추구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작년에 발표한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라는 작품은 한국춤평론가회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창작 부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감독님에게 전통춤과 창작춤은 각각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정재만 선생님의 제자라서 전통춤꾼이라고만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창작활동도 꾸준히 해 왔는데 잘 알지 못하더군요. 올해 1월에 작품상을 받으면서 고통의 과정이 보상받고 창작자로서 인정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스승님이 전통춤으로 유명하셨기 때문에 스승의 춤을 최선을 다해 춰야 하는 것은 소명의식이며, 숙대에 재직하고 있으니 스승의 춤을 지켜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니 창작 작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수가 되면서부터 전통춤 공연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해가고 2년에 한 번은 창작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정재만 선생님의 출발점도 창작이었으니, 그 영향도 있을 겁니다. 

 

작년에 벽사춤보존회를 설립하셨는데, 어떤 목적으로 설립하셨고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요? 전통춤을 매일 새벽까지 홀로 연습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혹시 정재만 선생님의 명성에 대한 부담이 있으신지요?

정재만 선생님의 춤을 배운 것은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이지만 숙대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춤을 사사하며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배움을 지속했고, 이후 강사, 교직생활을 하면서 스승님이 퇴임하실 때까지 지도자로서의 삶을 옆에서 배웠습니다. 스승은 춤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지 올바른 길을 직접 보여주신 분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서 있게 한 유일무이한 춤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 타계 이후에 헌정 무대를 통해 스승을 아는 모든 분과 그리움을 나누고, 제자들에게는 스승의 춤을 알리고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타계 7주년이 되었을 때 용기를 내어 추모 공연을 올렸습니다. 제자들에게 춤의 맥을 짚어주고 스승을 기리는 날을 정하고 춤을 통해 역사를 바르게 알려주고 싶어서 보존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을 떠올릴 때 가장 생각나는 장면은 연습하고 땀을 닦는 모습과 땀에 전 연습복을 갈아입는 모습입니다. 너무 존경스러웠고 그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어느새 저도 연습이 몸에 배어 연습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듭니다. 이 습관을 제자들에게 강요하지는 못하겠지만 보여주며 따라와 주길 소망합니다. 스승님도 연습을 강요하지는 않으셨어요. 훗날 스승님을 하늘에서 만났을 때 “스승님, 잘 지켜보고 계셨죠?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어요.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고 싶은 거죠. 저의 사후에도 그런 제자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제자 중 누군가는 또 저처럼 춤꾼-교육자-안무자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창작과 전통 두 분야 모두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진_ 최해리 

 

‘필.춤.’은 차 감독님의 전통춤에 대한 역량이 현대무용을 전공하신 부군 이영일 연출가의 다양한 예술에 대한 감각과 결합해서 탄생한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감독님에게 연출가인 부군은 어떤 존재입니까?

춤꾼이 공연의 모든 것을 감당하기는 힘들다며, 기획, 연출 등 스태프의 역할은 자신이 떠안을테니 춤에만 전념하라고 북돋아 줍니다. 연애시절에 그 효과가 검증되었기 때문에 평생의 파트너로 삼게 되었죠. 이 선생은 “머물러있으면 썩는다”고 늘 강조해요. 세계적인 공연 경향을 공부하고 알려주지요. 우리는 공연, 작품,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합니다. 특히 순헌무용단이 변화를 위해 도전할 수 있도록 해외의 용감한 무용단에 대해 많이 알려주니 제 시야가 많이 확장됩니다. 연출가는 제가 안주하지 않게끔 현실을 자각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태평무> 공연 장면 © 순헌무용단

 

필.춤.’에서 감독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은 어떤 부분인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하얀 도화지의 상수에 난 한줄기가 펼쳐지고 태평무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태평무는 사군자의 난을 상징해요. 난을 닮고 싶은 마음에 오른손을 들어 그림 위에 펼쳐지는 난의 줄기 끝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이때 “내가 정말 고풍스러운 춤을 추는구나”라는 감정이 밀려옵니다. 인생이란 꽉 채우는 것보다 이렇게 여백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죠.

 

현재 공연을 1주일 앞두고 있는데, 티켓이 매진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 1,200석이죠? ‘거리 두기’도 아닌데 전 좌석이 매진되었다니, 축하드립니다. 사설무용단이 한국춤 공연으로 전석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데요. 비결이 무엇인가요? 

2주 전부터 예매 문의가 쇄도해서 3층까지 오픈했어요. ‘필.춤.’은 대규모 공연단이 출연하니 역동적이고 볼거리가 많죠. 라이브 국악반주에 미술작품이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제작되잖아요. 이런 점들이 관객에게 많이 어필되는 것 같아요. 볼만한 공연이라고 입소문이 많이 났고, 재구매가 많아지면서 ‘필.춤.’을 보는 팬층이 생겼다고 할까요. 매년 달오름극장에 올렸는데 올해는 대극장에서 공연한다니 어떻게 달라지는지 많이들 궁금해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교수 타이틀이 있다 보니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의 무용수 지원 외 지원금 선정에서 매번 배제됩니다. ‘필.춤’과 같은 대규모 공연은 제작비가 만만치 않은데, 유료티켓으로 충당할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코로나 이후 무용단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티켓료를 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구매해 주시는 관객들에게 감사합니다. 좋은 공연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티켓판매로 이미 대박이 났지만, 실제 공연으로도 크게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필.춤.’은 매년 무대에 올릴 것입니다만, 2년 뒤의 순헌무용단 10주년 공연과 10년 후의 ‘필.춤’ 20주년 공연에서 어떻게 발전하는지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22.04.03.(일) 오후 3시 | 숙명여대 새빛관 4층 연습실

인터뷰어_ 최해리(발행인, 무용인류학자)

사진제공_ 순헌무용단, 최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