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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적’ 무용사를 실험한 무용역사기록학회의 도큐먼트퍼포먼스: 〈Reconnect History, Here I am〉

무용사 교과서를 펼치면 나열되는 날짜, 장소, 작품, 인물 등의 정보에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은 경험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미건조한 정보들 사이에서 ‘사람’을 만날 때 숫자와 문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루이 14세를 태양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가 공연된 날짜는 1653년 2월 23일이다. “1653.02.23.”은 내전으로 도망쳤다가 파리로 돌아온 지 약 2달밖에 안 되어 불안함에 떨고 있던 14살 소년 루이를 만날 때 숫자 이상의 의미를 던져준다.



 

사료에 근거하여 객관적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배치한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 서술 방식이다. 포스트모던 이후로 역사 서술에서 역사학자의 능동적인 해석과 가치판단을 존중하고 있다. 역사를 만든 것도 ‘사람’이고, 역사를 쓰는 것도 ‘사람’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춤의 역사는 사료를 읽어내고 써내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국의 무용학자 자넷 에쉬헤드-랜즈데일은 무용사 서술의 대부분이 개인에 의한 역사적 해석의 창조적 과정인데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무용역사기록학회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와 공동기획한 〈Reconnect History, Here I am〉은 무용사에 대한 ‘사람적’ 접근법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젝트였다. 9월 29일과 30일에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공연된 이 프로젝트는 예술감독 최해리, 연출 김재리, 드라마투르그 정혜정, 안무에 김영미, 김선정, 김연정, 김윤수, 김태훈, 정은주, 태혜신이 참여하였다.



 

이 프로젝트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역사 속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무용사 방법론 탐색이라는 점이다. 방법론의 개요는 참여하는 7명의 안무가가 20세기 세계무용사 인물(단체)에서 각자 1명(개)의 대상을 선정하여, 연관된 도큐먼트(흔적)에 기반하여 자신의 기억과 신체적인 반응을 통해 그들을 리서치하고, 현재 나의 움직임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역사 속의 인물들은 더 이상 무용사 교과서나 박물관의 유물로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라 오늘날 ‘나의 춤추기’ 속에 함께 머무르게 된다. 이점에 있어서 〈Reconnect History, Here I am〉은 기존의 역사적 춤의 복원이나 재현과 분명히 다른 입장을 취한다. 또한 마크 프랑코 교수가 바로크댄스의 연구와 공연을 위해 전통적 구성의 재현 대신에 안무적 구성을 통해 역사적 몸을 수행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 프로젝트는 무용사 연구의 창조적 과정을 안무의 창조적 과정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용역사기록학회는 춤의 기록과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학술단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이론 영역과 실기 영역을 융합하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도큐먼트퍼포먼스라고 지칭한 〈Reconnect History, Here I am〉은 렉처퍼포먼스와 아카이브전시를 혼합함으로써 안무와 공연을 위한 리서치, 그리고 역사적 리서치에서 촉발된 안무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리서치 역시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과정임을 전면에 드러내었다.



 

김선정이 선정한 강선영, 김태훈이 선정한 한성준, 태혜신이 선정한 최승희, 김윤수가 선정한 박금슬, 김영미가 선정한 피나 바우쉬, 정은주가 선정한 테드 숀, 김연정이 선정한 이애주 등, 시대를 넘나드는 안무가의 목소리와 몸짓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현현하였다. 김선정은 스승 강선영이 들려주었던 태평무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 시간의 기원을 현재의 기원으로 연결시켰다. 김태훈은 한성준의 가르침을 거슬러 올라가 전통에 고정되지 않는 창작무용가 한성준의 안무법을 몸으로 그려냈다. 태혜신은 최승희의 육성녹음된 노래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21세기 AI의 시대에 도래할 최승희를 소개하였다. 김윤수는 자신의 발레 경험과 몸의 감각으로 박금슬의 한국춤 정신을 소환하였다. 김영미는 피나 바우쉬의 질문인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를 오늘날 춤을 추고 춤을 교육하는 자신의 질문으로 되돌렸다. 정은주는 테드 숀의 <리본 안무>를 리듬체조 국가대표였던 자신의 몸에 각인된 리본체조 테크닉으로 구현하며 현대무용 장르에 대한 자신의 의문을 녹여내었다. 김연정은 스승 이애주의 저서와 자신의 일기를 낭독하고 스승으로부터 전수된 몸의 텍스트를 자신의 춤정신으로 승화하였다. 


퍼포먼스 과정에서 흥미롭게 드러난 지점은 장르의 넘나듦이었다. 한국의 무용계를 집요하게 지배하던 실기전공 3분법이 무용학 연구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에서 이들의 경계넘기 혹은 융합시도는 흥미로운 충격이었다. 음악과 춤, 스포츠와 현대무용, 발레와 한국무용 등 완강해 보이는 경계선을 뛰어넘는 통찰력의 발휘는 ‘몸으로 만나기’라는 방법론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다룬 무용사의 대상들이 예술춤의 경계선에 머물렀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는 현재 우리가 다루는 무용사의 범위가 여전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Reconnect History, Here I am〉의 실험적 시도는 무용을 연구하는 방법, 춤을 추는 방법, 무대화하는 방법, 관객/독자와 관계를 맺는 방법 등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무용사가 지금의 ‘나’와 ‘내 춤추기’와 무슨 상관일까?”라고 생각하는가? 창조적인 춤과 연구를 돕는 사람 간의 만남을 생각해 본다면 춤의 역사가 내 춤추기에 드리운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_ 김수인(무용이론가)

사진_ 2022 SIDance / ⓒ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