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삶에서 겪는 고통과 고뇌를 쾌감과 환희와 즐거움과 웃음으로 승화시킬 힘을 갖고자 한다. 축제에서 경험하는 자기 변화에 힘입어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긍정적인 변용의 힘을 얻는다. 축제를 통해 인간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견뎌낼 수 있는 자양분을 섭취한다. 축제는 우리를 관습적인 상황에서 비관습적인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관객들은 일상적인 자아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서 축제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일종의 사이 상태(betwixt and between)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리미널리티(liminality, 전이성) 경험을 하며 스스로 변화됨을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와 엑스터시야말로 축제가 제공하는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2023년 6월 23일 신원 박산 합동묘역에서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무로 시작된 아시아1인극제는 한대수 대표와 유진규 예술감독의 노력 덕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거창의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한국 1인 퍼포먼스 예술가들을 결집하는 중심점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축제의 공연들은 그 장르의 다양성뿐 아니라 예술적 완성도 및 관객과의 교류 측면에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첫날 거창문화원 상살미홀에서 펼쳐진 공연들은 이틀째와 사흘째에는 고제 삼봉산문화예술학교 야외 및 실내 무대에서 계속 이어졌다. 관객들은 승무에서 시작해서 마술에 이르기까지 1인 퍼포먼스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만끽했다.
1인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 언어가 최소화되거나, 또는 말이 주가 되면서도 말소리를 통해 소리의 현상적 물질성을 강조하면서 관객과의 소통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퍼포머와 관객 사이의 긴밀한 격정적 생리적 에너지적 교류가 활발하다. 다시 말해 관객의 감각적 지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고 유도하면서 신체와 정신을 통해서 지각과 의식이 동시에 작동하게 된다. 그야말로 퍼포먼스에서 나온 퍼포머티비티(performativity), 곧 수행성이 강하게 작동하는 공연들이 대부분이다. 지면 관계상 모든 공연을 다룰 수 없기에 특히 수행성의 작동이 강한 공연들 위주로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백형민의 승무 <하늘을 나는 물고기>는 움직임과 제스처의 정동과 고저, 완급과 강약이 첼로 소리의 뚜렷한 현상적 물질성과 어우러져 관객의 시청각적 지각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물고기의 유영을 재현하는 듯한 몸짓과 움직임에 승무 의상의 펼쳐짐과 접힘이 주는 아름다움 역시 시각적 자극으로 다가오면서 관객과의 감성적 교류를 우아하고 수준 높게 이끌어나간다. 이삼헌의 <레퀴엠, 바람의 빛깔>은 영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하여 기후위기와 자연재해를 제시하며 동시대인들의 책임과 아픔, 또한 바람직한 자연의 모습에 대한 소망을 춤으로 승화시킨다.
성희주의 <노라>와 후미히로 요시노의 <넘버링>은 유사한 의미들을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들이면서도 그 예술적 형상화 방식은 사뭇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관습과 규범, 강요와 획일화에 맞서 저항하고 대결하면서 자유와 독립과 주체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그 진행 과정의 상이성이 더욱 흥미롭다. <노라>에서 퍼포머 성희주는 소고를 품에 안은 채 흰옷에 검은 외투를 걸치고 시종 고통스러운 표정과 몸짓과 움직임에 사로잡혀 있다. 처음에 그녀는 소고를 그저 손에 쥐고 있을 뿐 제 장단과 소리를 내지 못한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을 옥죄던 검은 외투와의 치열한 싸움 과정을 통해 그것을 벗어버리고 밟아버리기까지 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소고를 치며 제 장단과 춤을 찾는다. 여기서 외투는 여성을 억압하는 외적 제도 규범 권위 등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작용한다. 또한 춤꾼의 몸과 표정은 비장하고 과격하게 다가온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녀의 몸짓과 움직임은 그 격렬함과 비장함으로 관객에게 기호적 의미와 동시에 수행적으로 수용된다. <넘버링>에서 퍼포머 후미히로 요시노는 온몸에 흰색 분장을 한 채 한 편의 퍼포먼스로서의 부토를 강렬하게 제시한다. 섬세하고 정교한 몸의 움직임과 제스처에 더해서 오브제들의 명료한 상징성이 두드러진다. 획일화된 제도와 관습 안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편안한 유모차를 타고 알록달록한 장난감에 안주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에 대한 고뇌와 번민은 마침내 강력한 몸짓으로 폭발한다. 팔과 다리, 얼굴표정과 손에 이르기까지 느린 움직임 속에 숨겨진 팽팽한 긴장의 에너지는 관객의 감각에 직접적으로 다가오면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에너지의 순환을 작동시킨다. 관객은 숨을 죽이고 퍼포머의 몸이 야기하는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르는 창발적(emergent)이고 연상적인 의미들에 사로잡힌다. 이로써 수행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조갑동의 <아케이드 게임>과 <페인팅>은 전자악기와 전자장구 등에 힘입어서 우리 전통 국악을 연주하는 실험적 퍼포먼스를 과감히 제시한다. 특히 태평가 모티브에 기댄 <페인팅>은 실제 악기 꽹과리와 태평소까지 직접 연주하면서 실제와 디지털 가상, 전통과 현대의 충돌을 넘은 공존 가능성을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구현한다. 또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장구채들을 두드리면서 앞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추기도 한다. 이는 결국 다양한 관객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함께 호흡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곧 1인 퍼포먼스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박창호의 <큰엄니>는 영감을 찾아 나선 노파가 도중에 겪는 갖가지 상황들을 오로지 몸의 움직임과 제스처, 오브제와 탈의 표정과 "영감"이라는 호명만으로 표현한다. 그런 가운데 관객은 그 상황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노파의 외로움과 슬픔에 공감하며, 객석과 무대 사이에는 이 감정의 에너지가 교류한다.
문진수의 <뫼비우스(검사 위에 백사)>는 사물놀이 연주의 도움에 힘입어 상모돌리기 등의 다양한 연희와 춤을 펼치면서 동시에 짙은 정치풍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로써 전통 연희적 1인 퍼포먼스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사회•정치적 풍자의 토대 위에서 동시대 관객과 호흡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리고 박정욱의 서도소리 <배뱅이굿>은 소리의 미학적 치열함과 완성도에 더해 시종일관 관객과의 직접적인 에너지 교류를 통해 극장 전체가 하나의 놀이마당으로 변화하는 힘을 과시한다.
서문정 만신의 <작두굿>은 한밤중 야외무대에서 퍼포머들과 관객들 사이에 한껏 달아오른 '에너지 교류'를 그야말로 정점으로 치닫게 만드는 퍼포먼스 예술의 최종 결정판과 다름이 없다. 먼저 징과 장구와 태평소가 어우러져 환각을 재촉하는 소리의 물질성이 만들어진다. 이에 더해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제의 과정이 주는 시각적 효과와 함께 영매가 된 만신의 주술적 언행까지 합쳐지면 굿은 관객의 능동적 반응을 재촉한다. 작두로 팔, 혀, 목, 배를 접촉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쌍작두와 외작두 위에 맨발로 올라서서 신대를 부여잡고 영매로서 주문을 쏟아낼 때, 관객과 퍼포머가 함께 하는 공간 전체에는 생리적 운동적 정서적 에너지의 교류가 작동하며 이로써 그 공간성의 분위기는 최고도로 고조된다. 한 편의 예술적 및 제의적 퍼포먼스로서 작두굿은 그 완벽성을 과시한다.
올해 아시아1인극제는 그야말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관객과 긴밀하게 호흡하고 에너지를 교류하며 즐거운 축제의 장을 만들어내었다. 관계자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풍성하고 창의적인 축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글_ 심재민(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