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게 빛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보광동’이 한남뉴타운 재개발 사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서정숙 무용가에게는 더 애틋하게 다가왔습니다. 11살 이태원으로 이사를 와서 무용학원에 다니며 보광동 골목골목을 다녔던 그에게는, 한 마을이 없어지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와 그 곳곳의 삶이 기억 저편으로 기우는 느낌입니다. 제자인 제 손을 잡고 마을 구석구석을 보여주시며 이곳이 없어지기 전에 춤으로 이곳을 기억하고 싶다고 하시는 선생님의 눈에는 강한 의지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 이 작업은 꼭 해야겠다. 선생님의 지금의 춤과 보광동 지금의 모습 둘 다 남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현장성이 짙은 공연의 형식보다는 골목 곳곳을 보여 주며 기록의 의미를 남기기 위해 댄스필름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조선 후기 한강에 하역된 짐을 나르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용산구 보광동 토박이들만의 작은 마을에는 일제 강점기 용산 일대가 군지기로 수용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둔지미 사람들과, 이주민,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온 사람들, 상이용사 등 많은 사람이 어우러졌습니다. 현재 보광동은 사람들에게 인식이 좋지 않아, 마을 이름을 없애고 ‘한남 뉴타운'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 넓게 빛나는 마을 보광동/ 용산문화원- 글 참고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몸들과 만나 묵혀둔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댄스필름 첫 씬에 등장하는 때 묻은 어린이 자전거는 보광동에 갈 때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연이 있어보였고 우연처럼 항상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반겨주는 것 같아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텝이 “이거 자물쇠가 시멘트로 바닥에 묻힌 주차금지 표시인데요”라고 하자 모든 환상이 깨졌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대상의 본질이 온전히 혹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과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을 더 자세히 보아야 이 작업이 온전히 흘러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춤을 추는 사람은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몸으로 ‘만나’ 담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보기'와 ‘만남'의 사이에서 무언가가 자꾸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 작업 또한 답을 바라지 않고 천천히 자세히 보는 것, 한 번 더 보는 것에 관한 공부였습니다. 작품에 어떻게 잘 담아 미적인 그림을 찍어 낼 것인가가 아닌, 이 장소에 내 몸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그 과정에 계속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하여 이 작업은 ‘완성'이 아닌 하나의 ‘물음'이 비로소 사람들과 교감을 일으키고 그 울림의 파장을 ‘기다리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사라져가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말은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고민 끝에 이 짧은 댄스필름은 두 가지 관점으로 촬영하였습니다. 곧 사라질 보광동을 춤추는 몸에 기입하여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 그리고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몸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 서정숙 선생님은 “골목 어디에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곳. 그곳에서 중년이 된 제가 어린아이로 돌아가 그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며 놀아봤습니다. 또 아픈 좀 덜어주고 싶은 옆집 아줌마의 마음으로 살풀이춤을 추었습니다”라고 작품에 임한 소감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작업은 2023년 8월3일 보광동 시티카메라, 음레코드에서 관객과 만났습니다.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청년예술가 생의 첫 지원 사업이 선정되어 더욱 힘을 받아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보광동의 상징 도깨비시장과 마을의 가장 큰 우물이 있었다는 장소에서 댄스필름 상영, 조아영 작가의 사진 전시, 촬영지 함께 걷기를 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언덕을 힘겹게 올라 이곳까지 와준 관객들은 “보광동이란 마을을 다시 알게 되어 새롭다” “골목춤이 마을을 다시 살려내는 군요” “앞으로도 살아있을 빛으로 담아주고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의 후기를 남겼습니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도 “우리 집 나왔네, 저기 봐봐” 하시며 영상에 나오는 마을을 보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참 따뜻했습니다.
사실 이 작업을 위해 더 자주 방문하고 동네 분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집요하게 작업에 임했는지 반성합니다. 모두 다른 사연으로 아직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주민 분들에게 최대한 피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이 작업을 해내려 했던 저희 팀의 마음이 두고두고 조금이나마 전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낮은 담장 넘어 서로를 보며 인사하고 좁은 골목길에 상대를 먼저 보내주는 몸짓에 참 많은 정서가 묻어납니다. 착취가 아닌 ‘함께 공존함'이 무엇인지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은 나의 중심을 유지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요.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을 여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쩌면 세월과 의식의 조각이며,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도 길의 숨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춤으로 묵혀둔 이야기를 꺼내려 합니다.
글_ 최예진(<골목춤 ‘보광동’> 감독 & kNOwBOXdance 노박스댄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