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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발적 기계 시대의 매체와 예술(가): ‘아하콜렉티브’론

 아하콜렉티브, , 3면 영상, 키네틱, 가변설치, 00:05:10,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아하콜렉티브’는 네 명의 1990년대생 여성 작가들로 이뤄진 팀이다. ‘아하’라는 팀명은 감탄사임과 동시에‘예술을 싫어하는 예술가들(Artists who Hate Art)’이란 아이러니한 태도를 응축한 것인데, 이는 네 명 모두 동양화를 전공했음에도 관습적으로 소비되는 차원의 ‘동양화’나 ‘전통’을 지켜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지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공식적 출발점이라 할 〈의문의 K-〉(2018)란 전시에서 이들은 사​군자(四君子)나 산수화, 한자와 같은 동양화의 구성 요소들을 원뿔과 같은 추상적 형체나 벽지, 혹은 전선 다발처럼 보이는 일상적 대상으로 치환했고, 이러한 전술은 이듬해 열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2019)에서도 이어졌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고민이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2000년대에만 국한해도 책가도(冊架圖)나 문자도(文字圖), 화조도(花鳥圖) 등 한국화의 전통을 다시 쓰거나, 병풍이나 족자에서 그림을 없애고 그 자리에 부수적인 장식으로 간주되던 ‘장황(粧䌙)’을 집어넣는 김지평(김지혜)의 인상적인 시도가 있었고, 이후 손동현, 김현정, 김신혜처럼 마이클 잭슨이나 힙합 아티스트인 투팍(Tupac), 혹은 배트맨 등의 대중문화 캐릭터들을 족자의  초상으로 변주하고, 진공청소기와 같은 광고대상과 전통적 여인상을 병치시키는 식의 팝아트적 시도가 이어진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분히 회화적 전통에 에너지를 집중한 선배들과 달리, ‘아하콜렉티브’는 보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소위 ‘미디어 아트’ 영역에 주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올해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선보인 4채널 비디오 〈몽유도원 The Journey〉(2023)과 수원화성 창룡문을 활용한 미디어 파사드 작업 〈극(極) Equilibrium〉(2023), 더현대서울과 유진상가의 거대한 옥내외 광고판에 설치됐던 〈Spanning〉(2023)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방면 역시 ‘전인미답의 블루오션’이라 하긴 어렵다. 〈동굴 속 동굴 Cave into the Cave〉(2013)에서 <가변적 풍경>(2016)을 지나 <와유소요(臥遊逍遙): 천천히, 느리게 걷기>(2022)에 이르기까지, 설치는 물론, 미디어 파사드와 AR을 아우르며 동양화 전통에 대한 고민을 매체 차원에서 심화, 확장해 온 이예승 작가가 있기 때문이다.1)


‘실제 건물의 외벽을 스크린으로 활용한다’는 점을 물신화하다 실질적으로 공회전 중인 미디어 파사드를 필두로, 이러한 세부 영역들이 빠르게 ‘레드 오션’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자신들을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로 이들의 눈과 귀에 띈 것은 사운드로 보인다. 2019년 <일월오봉>에서 활용한 광화문 광장의 시위 소리나 〈원(O)ne〉(2020)과 같은 설치 작업들이 웅변하듯, 사운드는 초기작부터 공존했지만 특히 최근 들어 전진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좀더 명확히 말해 이는 ‘디지털’에 대한 고민과 중첩되어 왔는데, 지난 9월 말 플랫폼L에서 열린 이들의 전시와 공연은 바로 이 지점에서 꼼꼼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아하콜렉티브x아우어퍼쿠션, , 3면 영상, 키네틱, 가변설치, 퍼포먼스, 00:45:00,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2022 플랫폼L 라이브아츠 프로그램의 최우수팀으로 선정된 연장선에서 열린 이 전시/공연의 제목 〈ppp pppp ppppp〉는, 주지하듯 ‘작게’ 또는 ‘여리게’를 뜻하는 ‘피아노(p)’, 즉 음량을 키우는 ‘포르테(f)’의 대척점에 선 기호들을 점층적으로 나열한 것이다. 실지로 내가 참관했던 9월 22일 공연에서 청각적인 요소는 시각적인 요소와 일종의 경합을 벌였다. 먼저 시각적인 요소들은 입구 좌측을 제외한 삼 면의 스크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인용구를 포함한 파편적인 구문들과 더불어 점멸하던 일련의 이미지들, 그리고 갤러리 바닥에 가깝게 설치된 채 제자리를 돌던 반원 형태의 조형물과 시차를 이루며 배치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여성 성악가가 단선율의 무반주 아카펠라로 공연의 포문을 열자, 마림바를 주축으로 삼는 타악기 연주팀 ‘아워 퍼커션(Our Percussion)’이 연주를 이어받았는데, 스네어 드럼을 동반한 전반부의 마림바 연주는 이후 선율과 화성이 배제된 타악기 연주로 이어지며 마무리되었다.

  

아하콜렉티브x아우어퍼쿠션, , 3면 영상, 키네틱, 가변설치, 퍼포먼스, 00:45:00,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어떤 의미에서 이 후반부 연주가 공연의 중핵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들이 연주한 곡이 미국의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작곡가인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의 <나무 조각들을 위한 음악(Music for Pieces of Wood)>(1973)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곡은 <피아노 페이즈(Piano Phase)>(1967)를 기점으로 라이히가 창안한 ‘페이징(phasing) 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동일한 음형을 연주하던 악기들이 한 박자씩 어긋나며 조금 빨리, 조금 늦게 겹치고 길항하며 만드는 청각적 패턴이 밀도 높게 전경화된다. 원래는 스페인어로 ‘열쇠’를 뜻하는 ‘클라베(clave)’라는 나무로 된 단소 모양의 타악기로 각각 라(A), 시(B), 도 샾(C#), 레 샾(D#) 그리고 한 옥타브 위의 레 샾(D#)음을 연주하지만, 이날 아워퍼커션은 다른 타악기로 대체해 연주했다. 이들의 타악기 연주가 재연한 차이와 반복의 기계적 음형들은, 미국의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글릭이 그의 책 『인포메이션』에서 캐링턴의 <아프리카의 말하는 북(Talking Drums of Africa)>(1949)을 환기하며 적절히 강조했듯, 모르스와 섀년을 통해 사이버네틱스의 ‘정보(information)’ 개념으로 이어질 길을 공유하는 것이다.2) 그것은 또한 아하콜렉티브의 전작인 〈Dialing〉과 〈0-Phasing-1〉의 연장선에서 ‘0과 1’, 또는 ‘On과 Off’라는 이진법과 이항대립을 축으로 삼아 스크린 안팎에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던 컴퓨터로 만든 인공 얼굴 및 반원 조형물과 함께 그 근본에서 공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음악과 디지털이 공유하는 감각의 논리를 포착했다는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도에 의문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디지털 정보 시대의 이미지 논리를 미니멀리즘을 매개로 규정한다는 건,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공연에서 연주된 <나무 조각들을 위한 음악>(1973)이 웅변하듯, 필립 글라스와 라이히가 미니멀리즘을 천명하고 규정했던 건 이미 반백년도 전의 일이고, 챗GPT와 미드저니로 대표되는 이른바 ‘딥러닝’ 시대의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시청각적 작업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에서 ‘기계적(mechanical)’이라 규정되던 것이 아니다. 가령 팝과 아방가르드를 오가며 작업해온 대표적 전자음악가인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이미 1996년부터 꾸준히 세공, 몇 년 전 ‘블룸(Bloom)’이란 이름의 앱으로 대중화한 ‘생성음악(Generative Music)’처럼 초기 조건에 따라 무한대로 변형가능한 형식의 음악을 ‘기계적’이라 부르는 건 거의 범주착오에 가깝다. ‘창발적(emergent)’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플랫폼L 공연장의 스크린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던 ‘기계적 이미지’와는 대척점에 서는 것이다.3) 모든 예술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성취의 우울(melancholy of success)’을 적극적인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면, 아하콜렉티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글_ 곽영빈(미술비평가, 예술매체학자(PhD).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교수)

  

1) 보다 자세한 논의는 곧 단행본으로 출간될 그의 작가론집에 포함된 나의 글(곽영빈, 「장자의 꿈과 벤야민의 부채 사이: 이예승 론」)과 이 글의 축약본이라 할 다음 글을 참조하라. 곽영빈, 「극세사와 무한 사이: 이예승 작가론」, 『퍼블릭아트』, 2023년 5월호, 86-93쪽.


2) 제임스 글릭, 『인포메이션』, 박래선 김태훈 옮김, 동아시아, 2017. 특히 1장을 보라. 

  

3) 전시장을 채운 지성민의 창작곡은 라이히의 것과는 다르나, 이러한 전시의 자장 안에서 작동한다.

※ 이 글은 『아트앤컬처』2023년 12월호와 공동게재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