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현장

포커스

[서평] 하이데거 예술론으로 바라본 우리 춤의 본질(1)

※ 이 글은 무용역사기록학회의 『Asian Dance Journal』 vol.70 에 게재된 글이다.

  

배학수 저, 『조선무용의 미학과 하이데거의 진리』 (해피북미디어, 2022)

 


Ⅰ. 무용계의 테두리 밖에서 쓰인 춤 미학 서적


배학수 경성대학교 교수의 『조선무용의 미학과 하이데거의 진리』는 꽤 독특한 책이다. 소위 ‘무용계’의 테두리 내에서 보기에는 꽤 낯선 시각으로 집필된 무용 서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한국무용(배학수 교수에 따르면 ‘조선무용’) 서적은 주로 무용 역사서이거나 전통무용에 대한 소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거나 그와 관련된 무용사, 무용용어사전, 무용 분석서 등이다. 서양무용 분야를 살펴봐도 크게 다르지는 않는 바, 해외 무용학자들의 무용미학 서적을 번역하였거나 무용비평서에 미학·철학적 사고가 녹아있는 경우는 있어도 이 책처럼 특정 철학자의 예술 담론을 근거 삼아 우리 춤을 기술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대학교에서부터 철학을 전공하고 석·박사까지 철학과에서 수학한 저자 배학수 교수는 현재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하이데거를 전공한 저자는 대학 시절 민속 가면극회의 활동 경험과 하이데거의 예술사상을 토대로 무용철학 논문 2편을 집필한 바가 있다. 2001년부터 <부산일보>와 『예술부산』에 무용 칼럼을 기고하였고, 그 글들을 발전시켜 이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무용계의 테두리 밖에서 바라보는 관점이기에 무용계의 시선으로는 정설을 깨는 주장도 담겨있으며 특정 춤을 바라보는 저자만의 독창적인 해석도 과감하게 드러나 있다. 그 해석들을 얼마만큼 수용할 것인가는 독자 및 연구자의 몫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무용의 본질과 가치’라는 제목의 1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조선무용으로 부르자는 저자의 주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바탕으로 하여 무용의 본질과 가치를 논의하고 조선무용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변해온 의미와 가치를 논의한다. 책의 대부분의 분량은 2부와 3부에 할애하고 있다. ‘전국적 조선무용’이라고 제목이 붙은 2부에서는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한량무, 입무(立舞), 신무용, 정재(呈才), 교방무(敎坊舞), 검무를 다루고 있고, ‘지역적 조선무용’으로 제목을 붙인 3부에서는 주로 부산 지역에서 추어지는 춤들인 동해안별신굿, 동래고무(東萊鼓舞), 동래야류, 수영야류, 지전무(紙錢舞), 동래학춤, 지신밟기를 다루고 있다. 



Ⅱ. 저자의 제안: 한국무용 대신 조선무용으로


배학수 교수는 기존의 무용 연구에서 공유하고 있는 개념이나 용어와는 사뭇 다른 주장을 한다. 그 중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조선무용’이라는 용어이다. 저자는 지금껏 우리가 ‘한국무용’이라고 불렀던 춤을 ‘조선무용’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한국무용, 전통무용 등의 용어를 정리해나가며 논의를 진행했다.


저자가 들고 있는 근거는 ‘한국무용’이라는 용어의 다의성이다. ‘한국무용’이라 하면 1) 한국의 무용 2) 한국적 무용 모두를 의미할 수 있기에 용어 사용에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무용’이란 한국에서 한국인이 공연하는 모든 무용, 즉 발레, 현대무용, 전통무용, 스트릿 댄스, K-Pop 댄스를 포함한 모든 춤을 뜻한다. 이와 달리 ‘한국적 무용’은 전통무용이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새로운 무용이다(p.13). 이처럼 한국무용이라는 용어는 그 범위가 너무 넓고 혼동이 있기에 저자는 한국적 무용을 일컫는 다른 용어를 고안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전통무용이나 전통에 바탕을 둔 ‘한국적 무용’이다. 전통이란 과거, 지난 시대, 즉 전근대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전근대라면 한일병합으로 조선이 멸망한 1910년 이전까지로 규정한다. 따라서 1910년 이전의 춤은 전통무용으로, 1910년 이후에 전통무용 형식으로 창작된 춤은 신전통무용(줄여서 신무용)으로 일컬을 수 있다(pp.14-15).


우리의 전통무용은 고려와 조선에서 내려온 것이며 대부분의 정재가 고려보다는 조선 시기에 창작되었고 여항무용 역시 거의 조선에서 연행된 것이므로, 전통무용은 ‘조선무용’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저자는 제안한다. 이 명칭에 설득력을 더하고자 저자는 전통이나 토종을 가리킬 때는 그것이 살아있었던 시대의 국호를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전통간장을 조선간장으로, 토종 무를 조선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라고 예를 들고 있다(p.16).


무용계 내에서 꽤 오랜 기간 ‘한국무용’으로 불러왔던 우리의 춤을 ‘조선무용’으로 부르는 것이 다소 어색하기는 하다. 우리나라에서 ‘조선무용’이라 하면 오히려 북한(북조선)의 춤을 일컫는 용어이기에 북한의 춤을 먼저 연상하게 된다. 일례로 북한으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한 최승희는 조선무용의 대명사로 바로 연결되며, 그가 정리한 무용 서적의 제목은 『조선민족무용기본』이다. 게다가 해방 후 설립되었던 조선무용예술협회가 한국무용협회(지금의 대한무용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점을 보아도 ‘조선무용’이라는 용어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춤, 한국무용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여 어떤 때는 발레/한국무용/현대무용의 장르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국의 춤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우리 춤의 역사 기술에 있어서 전통무용, 전통춤, 신무용, 한국창작춤 등 용어의 통일적 설명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학수 교수의 제안은 무용 연구에서 하나의 쟁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Ⅲ. 무용의 철학적 탐색: 하이데거의 예술론과 무용예술의 진리


배학수 교수는 이 책을 집필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 춤이 멋있다고 말하려면 미학적 탐구를 통해 우리 춤의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p.5) 그 미학적 탐구는 다음 세 방향을 지향하는데, 첫째, 자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위해 작품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병행될 것, 둘째, 개별 무용작품에 건설되어 있는 존재의 진리를 파헤쳐 작품의 보편성을 드러낼 것, 셋째, 작품이 한국 사회에 어떤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발현하는 것이다(pp.5-6).


저자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예술론을 미학적 탐구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 창작은 작품에 진리를 건설하는 활동이며, 예술 감상은 작품에서 전개되는 진리를 깨닫는 활동이다. 이 견해는 진리 건립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p.23) 이에 비추어 볼 때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작품 속에서 건설된 진리가 감상자에게 표출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이것이 예술의 가치라고 저자는 주장한다(pp.23-24).


진리의 건설이라는 예술의 본질은 모든 예술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바이나 예술의 매체에 따라 진리 건설의 방식은 다르다. 무용은 기본적으로 비언어 예술이기에 다른 예술에 비해 구체성이 부족하다. 때문에 무용 작품은 관객들에게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백조의 호수>같은 고전 발레 작품은 마임이나 전형적 동작이 많이 사용되어 감상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머스 커닝햄의 <공간 속의 점(Point in Space)>은 완전 추상 무용으로서 감상자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순수 동작 작품도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의미를 만들어내면 존재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피력하는데, 결국 이도 감상자가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모르는 외국어가 그냥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해석이 불가능한 무용 작품은 감상자에게 어떠한 진리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배학수 교수는 춤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비평 관점을 드러내는데, 가령 머스 커닝햄의 두 작품 <공간 속의 점>과 <루스 타임>을 비교하는 대목이다. 완전 추상 무용인 <공간 속의 점>에서 커닝햄은 의도적으로 동작이 현실의 사태를 지시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감상자들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런 작품은 감상자에게 가치가 없다고 한다(p.34). 반면에 <루스 타임>은 역시 순수 동작으로 이루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동작들이 연결되는 방식에서 감상자는 ‘삶의 근본적 이중성’, ‘삶의 모순적 양상’과 같은 진실을 직관할 수 있다고 말한다(p.36). <공간 속의 점>이 무용사적으로나 다른 철학적 관점에서 가치를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저자에게 이 춤은 그저 하나의 외국어일 뿐이었기에 그에게는 진리를 드러내는 작품이 되지 못한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감상자가 어떤 무용작품을 마주할 때 작품 속에 은폐되어 있던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진리인가.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미학과 예술론에 대하여 심도 깊은 논의까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다른 논문에 의하면 무용이 예술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한국무용이든 서양 무용이든, 작품에서 세계와 진리가 표출되어야 하며, 무용가가 작품에 표출한 진리를 감상자가 깨달아야 한다. 무용은 자신의 매체인 동작으로 사물을 모방하거나 세계와의 관계를 표출함으로써 사물의 진리와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진리를 표출할 수 있는 동작을 구성하는 창작자와 그것을 이해하고 진리를 포착해내는 감상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는 곧 주관성과 해석의 영역으로 연결되는데, 조선무용에 대한 저자의 기술과 해석은 하이데거의 미학을 실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_ 이희나(댄스포스트코리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