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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이데거 예술론으로 바라본 우리 춤의 본질(2)

※ 이 글은 무용역사기록학회의 『Asian Dance Journal』 vol.70 에 게재된 글이다.


 

배학수 저, 『조선무용의 미학과 하이데거의 진리』 (해피북미디어, 2022)




Ⅳ. 조선무용의 여러 갈래


1. 조선무용을 분류하는 새로운 관점


저자는 기존의 무용계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선무용을 해석하고 의미화 한다. 각 춤의 각론으로 들어가서도 각각의 역사나 기원을 해설하고, 그 춤의 미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또한 이 춤들이 현대 사회에서 갖게 되는 달라진 의미들도 기술하는데, 역사에 따라 가치나 기준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책의 2부는 ‘전국적 조선무용’, 3부는 ‘지역적 조선무용’으로 구분하여 춤을 분류하고 있다. 전국적 조선무용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추어져 온 춤이고 지역적 조선무용은 말 그대로 해당 지역에서만 추어져 온 춤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특정 지역 춤에는 그 지역만의 향토성이 배어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쉬우나, 저자는 그러한 독특한 향토적 개성은 없다고 말한다. 설사 과거에는 역사적, 지형적 차이로 인해 각각의 지역에 지리적, 사회적 특성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제 이 좁은 한반도에서 그러한 차이는 사라졌다고 저자는 주장한다(p.279). 따라서 이 책에서도, 부산 지역의 춤에 부산 춤 특유의 성격을 기술하는 대목은 없다. 다만 해당 춤의 특성을 서술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전국무용과 지역무용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각 지역마다의 독특한 특징은 없더라도 해당 지역 출신의 무용수가 자신의 지역에서 주로 활동할 때의 개성을 그 지역의 무용이라고 부르자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령,


지역 무용=조선무용+지역 무용수의 개성

서울 무용=조선무용+서울 지역 무용수의 개성

대전 무용=조선무용+대전 지역 무용수의 개성


이 되는 셈이다(p.280). “21세기 지역무용이란 향토무용이 아니라 지역 무용가의 개성이 담겨 있는 조선무용”이라고 저자는 피력한다(p.280).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춤에 대한 논의들은 저자가 <예술부산>에 기고했던 글을 확장한 것이어서 특정한 선정 기준이 보이지는 않는다. “부산무용 미학”이라는 기획 아래 집필한 글이었는데, 여기서의 부산무용 역시 ‘부산적 무용’이 아니라 부산에서 공연하는 조선무용이기에 어떤 춤들은 전국적 조선무용으로 분류된 듯하다.


부산에서 강원도로 이어지는 동해안에서 추어지는 춤이라든가(동해안별신굿) 동래고무, 동래야류, 동래학춤, 수영야류 등 부산의 지역 명을 딴 춤들은 부산 지역의 조선무용으로 분류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전통이라고 ‘잘 못’ 알고 있는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 1930년대 한성준이 정리한 신전통무용 계열을 비롯하여 한량무, 입무(立舞), 검무 등은 전국적 조선무용의 카테고리에 넣었다. 여기에 더하여 정재(呈才)와 교방무(敎坊舞)와 같이 궁중과 지방 관아에서 추어졌던 전통춤과, 최승희와 조택원으로 대표되는 신무용을 포함시켰다.


일본에서 서양무용의 영향을 받아 전통무용의 동작이나 구조를 개량하자는 요구로 시작된 신무용 운동은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저자는 최승희의 춤이 1) 개인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2) 새로운 방식으로 조선적 정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신무용(p.130)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첫 번째 특징은 서양 현대무용의 특징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신무용의 외연이 너무 확장되어버리기에 두 번째 이유로 인해 최승희의 춤을 신무용으로 부를 수 있다고 평가한다(p.130). 조택원은 조선의 승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가사호접(袈裟胡蝶)>(1935년 초연 당시의 제목은 <승무의 인상>)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무용 동작이 서양 현대무용과 조선무용이 섞여있으며 창작 당시 조선의 승무가 종교적 기상이나 철학이 부재하고 기교만을 뽐내는 춤이었던 것에 반발하였다는 점에서 신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신무용은 조선무용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당대의 예술 경향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춤 경향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에도 신무용의 창작 내지 신무용운동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김은이 안무의 <부산 아리랑>(2005년 11월 11일 초연,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을 최근의 훌륭한 신무용 작품으로 꼽는다. 이 작품은 조선무용의 동작과 국악기 반주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전통무용이지만, 안무가가 창작한 새로운 춤들이 들어가 있으며 도살풀이 장면 역시 거의 추상 동작으로 구성되어 춤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였다(pp.134-135). 저자는 이처럼 조선무용의 전통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요소가 가미되거나 전통성을 개혁하고자 하는 작품을 모두 신무용으로 간주한다.

 

2. 개별 조선무용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주장


이 책에 등장하는 16개의 무용 작품이나 카테고리는 익히 한국무용 이론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무용들이다. 저자는 이 춤들의 역사적 배경이나 명칭에 대한 기원, 연행의 의미 등을 탐구하고 각 춤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만의 독특한 해석이나 미적 판단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 평가가 파격적이고 과감하기까지 하다.


교과서에도 실린 조지훈의 시 <승무>로 인해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승무>는 제목과 다르게 절에서 추어지는 춤이 아니다. 20세기 초 권번에서 창작된 이 춤은 ‘권번 승무’로서, 초기의 권번 승무에는 “승려가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다가 장삼과 고깔을 벗어던지고 세속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서사가 있었음을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종교의 시선으로 보면 불경할 수 있는 스토리로 인해 불교계의 항의가 있었고, 결국 당국으로부터 공연이 금지되어 승무에서 서사가 빠지고 오늘날의 스토리 없는 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로는 과거의 서사 승무가 오늘날의 비서사 승무보다 감상자들에게 훨씬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승무>의 동작과 서사가 동행할 때 관객들은 존재의 진리를 직관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살풀이춤은 제목 때문에 살을 풀고 액을 예방하는 굿 의식과 관련이 있을 거라 추측하기 쉽지만 이는 해석의 오류라고 지적한다. 살풀이춤에 사용되는 장단은 무속의 살풀이장단이 아니라 굿거리장단이며 후반부는 자진모리장단으로 흐른다. 보통 ‘살풀이’라는 제목과 살풀이 음악에 얽매여 작품의 내용을 애원성과 한(恨)의 극복이라고 오해하여 왔으나 저자의 생각에 작품의 본질은 자유의 회복과 신명이다. 신명이란 자유를 회복하는 투쟁과정에 수반하는 환희의 정서라고 저자는 적었다(p.79). 동작의 모양새를 분석하면서 환희와 신명의 대목을 미학적으로 풀이하면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흔히 입춤이라고 부르는 무용을 저자는 굳이 입무(立舞)라고 부르자고 한다. 한자인 ‘입(立)’에 순우리말인 ‘춤’이 연결되면 어색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검무를 ‘검춤’, 고무를 ‘고춤’, 승무를 ‘승춤’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입무만 ‘입춤’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며, 한국무용사를 ‘한국춤사’로 부르는 조합도 같은 이유로 어색하다고 주장한다(p.110). 우리 무용사에서 ‘무용(舞踊)’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신무용’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시기부터 ‘무용’은 곧 예술춤을 뜻하는 용어로 인식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오늘날 무용학계에 고착된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야 비평계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무용’ 대신에 우리 고유의 용어인 ‘춤’을 사용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일부에서는 그 뜻을 따라 무용을 가급적 ‘춤’으로 부르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한국춤사’와 같은 용어는 이러한 정신에 비롯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춤’이라는 순우리말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p.110)로 말하지만 ‘춤’이라는 용어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용어에 대한 지적은 선유악(船遊樂)에서도 등장한다. 보통 ‘선유락’으로 부르는 이 정재를 저자는 ‘선유악’으로 읽는 것이 낫다고 제안한다. 한자 ‘樂’을 읽는 두 가지 방법(노래 ‘악’, 즐길 ‘락’)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선유악’은 뱃놀이를 하면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의미이며 ‘선유락’은 단순히 뱃놀이를 의미(p.143)한다. 따라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뜻이 포함된 ‘선유악’이 적합한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상의 이의 제기가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불러왔던 춤의 이름과 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또한 무용의 기원이나 발생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잘 못 알려진 학설에 대해 꼼꼼히 지적하고 있다. 가령, 야류, 지신밟기, 학춤은 민속예술이지만 동래고무와 동래한량춤은 민속예술이 아니다. 동래고무는 조선의 관아 예술이며, 동래한량춤은 관아 예술인 승무로부터 20세기에 개발된 춤이라고 한다(p.196). 동래야류는 학자 송석하에 의해서 1933년 『조선민속』에 소개되었는데, 이 때 ‘들놀음’이라는 뜻의 한자 ‘野遊’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2012년 이훈상 교수가 찾아낸 동래야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보면 그 연행 조직의 이름이 ‘야류계(夜遊契)'라고 적혀있다. 아직은 모두 학설이고 후속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나 저자인 배학수 교수 역시 동래야류의 연행방식이나 내용을 보면 들놀음보다는 밤놀음에 가깝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pp.210-212).


그간 탈춤이라면 으레 따라붙었던 양반층에 대한 서민의 저항이나 풍자와 같은 정신에 대해서도 배 교수는 이의를 제기한다. 동래야류의 연행 주체는 농민이 아니라 하급 지배층이었고 19세기 동래야류의 후원자나 연희자 역시 농민이 아니라 향리나 장교들이었다. 이에 미루어 볼 때, 동래야류는 다른 탈춤과 달리 특권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저항적 성격이 약하며, 오히려 중인계층의 신분 상승 욕구로 인한 권력 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p.213). 양반 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분노의 표현으로 보이는 영노 과장은 원형 동래야류에는 없었으며 1960년대 이후 추가된 과장이다(p.214). 수영야류를 풍자로 보는 것 역시 표면상의 이해일 뿐이다. 수영야류는 네 개의 장 모두 서로 죽고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여기서 저자는 니체의 “힘을 향한 의지”를 끌어와 설명을 더한다. 관객들은 탈춤을 보며 힘이 있는 역할(말뚝이, 사자 등)에 동일시를 하게 되는데 이는 힘의 상승을 지향하는 인간의 보편적 소망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pp.231-233).


그 밖에도 동해안별신굿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김진홍류 지전춤이 사실은 진도씻김굿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주장하며, 연로한 무용가들의 구술자료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여 입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p.238). 또한 동래학춤을 학의 동태를 모방한 춤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이는 ‘학춤’이라는 이름 때문에 갖는 편견이다. 동래야류 본 공연 전에 짤막한 여러 개의 춤을 추었는데, ‘큰 배김춤’이 그 중 하나였고, 그것이 바로 이 동래학춤의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이 춤을 ‘동래 큰배김춤’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하고 있다(p.252).



Ⅴ. 우리춤 연구에 주어진 역사적, 미학적 과제


배학수 교수의 『조선무용의 미학과 하이데거의 진리』는 그동안 무용계 내부에서 쌓아온 한국무용에 대한 고정관념과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여러 방면에서 흥미로운 논쟁을 시도한다. 어떤 부분은 저자의 개인적 견해로서 낯설고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많은 역사적 자료들과 연구를 토대로 제기하는 새로운 해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춤에 대한 저자의 기본적 태도나 비평의 틀은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때때로 프로이트나 헤겔, 니체의 철학을 접목하여 우리의 춤을 분석하고 미학적 비평을 시도한다. 탈춤을 니체의 ‘힘을 향한 의지’의 발현으로 본다든지, 양반-말뚝이 마당을 에로스와 파토스의 표출로 해석하는 대목은 상당히 신선하다. 또한 굿의 체험을 엘리아데의 종교적 인간으로 풀이하고 살풀이춤이 드러내는 자유를 향한 신명을 헤겔의 철학으로 설명하는 부분도 여느 춤 연구나 비평에서 보기 힘든 미학적 분석이다.


이 책은 철학적 시각을 갖고 우리 춤을 비평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이루어진 무용 미학 연구를 보면 해당 철학자(미학자, 사상가)의 이론을 정리한 후 춤에 피상적으로 무리하게 연결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면 각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뜬구름 잡는 일반적 담론에서 그치게 된다. 깊이가 없고 발전적 연구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간의 한국 무용 연구는 대부분이 무용사나 인물 위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책에서도 역사와 인물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그것이 연구의 종착지는 아니다. 그 역사적 연구를 통해 작품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그것에서 미학적 예술적 가치를 찾아내려고 하는 시도이다. 나아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또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화 발전해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시대적 요구에 따른 제언도 잊지 않는다.


배학수 교수는 하이데거 연구자답게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단순히 무용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감상자 중심으로 예술의 의미를 포착하여 진리를 건립하고 무용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학문적 근거를 찾아 풀어내는 작업이 이 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글_ 이희나(댄스포스트코리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