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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과 현대무용 그리고 스트릿 댄스의 미적 사유

 

 나는 스트릿 댄스를 오랫동안 춰오면서 이와 함께 순수무용도 20년 가까이 춰오고 있다. 순수무용 중에서도 현대무용을 가장 오랫동안 춰왔는데 움직임의 깊이와 무게가 매력적이다. 또한, 한국무용 공연에 객원무용수로 출연하면서 한국무용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어떤 춤보다도 몸에 흐르는 호흡의 매력이 마력적이다. 내 생각에는 한국무용을 한국인의 호흡이 흐르는 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그처럼 우리민족의 정서와 한이 깊게 묻어 있는 한국 춤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춤을 배우고 경험하면서 느낀 점은 서양에서 들어온 현대무용은 직선의 곧은 느낌이 강하다. 반면 한국무용은 구부러지는 듯한 곡선의 느낌이 강하다. 현대무용은 직선이며, 한국무용은 곡선의 미를 갖추고 있다. 현대무용이 서양에서 출발해서 그런지 서양인들의 삶의 정서가 묻어있는 거 같다. 서양인들의 철학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꽃이 예쁘면 그것을 꺾어서 자신이 소유하며, 의문점이 생기면 꼭 그것을 객관적으로 접근해서 규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직선의 미가 강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반면, 동양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없다. 그리고 꽃이 예쁘면 꺾기보다는 꽃 모양과 향기를 오랫동안 음미하는 공동체의식이 강하다. 게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꼭 그것을 객관적으로 규명하기보다는 의문점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둥글둥글한 곡선의 미가 나타나는 것 같다.

 

  나는 도시화되지 않은 시골길 걷기를 좋아한다. 특히 가을과 봄날의 시골길에서 풍기는 풀 냄새는 긴장된 일상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그런데 길을 걷다 문뜩 느끼는 점이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러니까 서양기술이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걸어간 자연스러운 흙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있다. 오래 걸어도 힘들지 않고 왠지 편안하다. 아무래도 구부러지고 휘어짐은 곡선적인 인간미가 느껴진다. 한국인은 곡선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양기술이 들어온 시멘트와 아스팔트 길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는 인공미가 느껴진다. 시멘트와 아스팔트 길은 목적지까지 걷기에는 편하지만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 이는 한국 사람은 흙과 함께 살아온 대지의 삶이며, 흙과의 친밀감은 흙을 밟아야 다리가 덜 피로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선은 인위적인 인공미가 느껴지며, 곡선은 자연적인 인간미가 느껴진다.


  서양의 발레와 현대무용은 삶 속에서 탄생한 것보다는, 무대에 맞춰진 춤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직선의 느낌이 강하다. 반면, 한국무용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얼과 흥취, 한이 한데 얽혀져 생성된 움직임이 무대 춤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곡선의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양의 발레와 현대무용이 한국무용에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직선의 느낌이 강하게 배어있는 듯하다. 저것이 한국무용인지 서양의 현대무용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다. 저것이 나쁘다기보다는, 한국 춤의 미가 서양 춤의 미와 융합되어 세계적인 미(美)로 나아가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고 본다. 


  반면, 한국적인 곡선의 특징적인 미가 점차 서양의 춤에 가려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얘기한 직선이 되어가는 한국무용은 창작무용이 혼합된 한국창작무용이다. 그러나 한국 전통춤은 직선의 동작보다는 곡선의 미가 짙게 깔려있다. 왜냐면 우리민족의 삶과 정서가 그대로 묻어난 순수 우리 춤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탄생한 스트릿 댄스는 특이하게도 곡선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나는 이점이 여러 춤을 공부하면서 의아했었다. 스트릿 댄스의 탄생은 거리의 삶에서 시작되었다. 전문적인 무대 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거리에서 시작되어 무대로 발전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어적인 의미로도 ‘스트릿(거리) 댄스’로 불리게 된 것이다. 거리에서 춤을 추게 되면 거리의 관객에게 굳이 인위적인 직선의 움직임을 보여줄 필요성은 없다. 직선의 움직임의 특징은 무대에서 자신의 신체동작을 최대한 크고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직선의 동작은 쭉쭉 뻗기 때문에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발레와 현대무용은 무용수의 기다란 신체조건이 중요하다. 신체조건이 좋지 못하면 그만큼 무대에서의 춤 동작의 우아한 선의 미는 더욱더 빛을 발휘하기 힘들다. 또한 직선은 무대공간에서 최대한 길게 사용하기 때문에 대체로 곡선보다 움직임 시간이 길다. 


  곡선은 대지와 신체가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임을 안으로 모으는 특징이 강해 시간을 움켜쥔다. 반면, 직선은 중력을 거스르고 공간을 더욱더 넓게 사용하기 위해 신체를 밖으로 뻗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곡선은 시공간의 포용이며, 직선은 시공간의 과시이다.


 


 

  스트릿 댄스는 거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굳이 동작을 직선으로 사용할 필요성이 없었다. 지나가는 거리의 관객에는 빠른 시간 안에 다양한 동작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곡선의 동작이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트릿 댄스는 무대 춤을 위한 탄생보다는 삶에서 느끼지는 분노와 저항, 자유의 갈망 등이 신체에 묻어 나와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스트릿 댄스는 무대예술로 발전하기 위한 발레와 현대무용과 다른 느낌의 춤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같은 서양의 춤이지만 삶의 환경에 따라 탄생배경과 목적이 다르며 춤의 성질도 다르다.


  한국무용과 스트릿 댄스가 ‘한’과 ‘분노’라는 삶의 형태에서 탄생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곡선적인 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무용과 스트릿 댄스의 곡선에 나타나는 유사한 특징은 바로 ‘한(恨)’과 ‘분노’의 표현이다. 근현대의 한국역사가 말해 주듯 ‘한’이 우리 삶에 진하게 배어있다.


   흑인 역사가 말해 주듯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서 드러나는 ‘분노’는 지배층에 대한 저항성이 그들의 삶에 깊게 묻어있다. ‘한’과 ‘분노’가 어찌 보면 유사하지만 한은 억누름이며 분노는 표출이다. 그래서 한국무용의 곡선의 미는 정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전하는 반면, 스트릿 댄스의 곡선적인 움직임은 거칠면서도 유연함이 묻어있어 공격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국무용의 곡선은 포용과 관용이며 스트릿 댄스의 곡선은 저항과 공격이다. 이렇듯 같은 곡선의 움직임이 녹아있는 춤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성과 삶의 형태와 탄생배경에서 확연하게 다른 차이와 느낌이 나타나는 것을 미적 사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글_ 이우재(서울예술대학교 공연학부 실용무용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