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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감각, 그리고 이미지의 서사: 〈내가 물에서 본 것〉

※ 이 비평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지역공연 비평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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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4-1 (2025.12.5.) 발행


글_ 조형빈(무용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현대무용단



피부라기 보다는 어떤 장기나 뒤틀린 신체에 가까워 보이는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무대 바닥에 도포된 비닐을 뜯어낸다. 금속의 부식을 막기 위해 금속 제품에 도포되곤 하는 그 푸른색 비닐이다. 비닐이 뜯어져 나오면서 나오는 비릿한 소음과 동시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 이 감각이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전체를 관통한다. 어떤 날카로운 것이 몸을 관통했을 때 우리가 인식하는 감각들, 내부적(감각이 발생하는 장소가 신체 안이라는 점에서), 혹은 외부적(이물질은 결코 신체와 동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감각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다시금 인지한다.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자신의 심장 수술 경험을 통해 타자의 침입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구성하게 하는 절대적 타성(alterity)을 소환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신체의 내외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질적인 감각들을 동원해 몸과 인간 존재를 다시 돌아보고자 시도한다. 따라서 금속판으로 덮여 있는 무대 위를 기괴한 의상의 무용수들이 구르면서 몸이 ‘몸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것, 그럼으로써 타자와 자기 신체 사이에서 균열을 내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이 공연이 보여주고자 하는 서사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김보라 안무가가 보조생식기술을 경험하면서 맞닥뜨린 몸에 대한 재사유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아기를 낳는 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몸으로 침투하는 몸 외부의 ‘물질’들과, 그에 따라 변화하는 여성의 몸이 여성 스스로의 의지로부터 벗어날 때 출현하는 소외의 국면들이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공연 리플렛에 실린 안무가의 말에 의하면, 안무가는 호르몬 주사의 여러 부작용 중 “전신 무기력함에서 내 몸의 감각 중 촉각에 대한 반응들이 점차 조용해지는 현상이 가장 두려웠다. 내 몸과 내 몸의 맞닿는 느낌, 타인과의 접촉, 내 몸과 공간과의 접촉 등 기존에는 당연했던 반응들이 사라져 가는 두려움은 몸의 변화 중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본인에게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매체였던 몸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나아가 자신의 통제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이를 통해 몸을 다시 돌아봐야만 했다는 것이다.


공연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번들거리는 금속 바닥, 뜯어져 쌓아 올려진 푸른색 비닐, 일렬로 서서 물을 토해내고 엉켜 굴러다니는 살덩어리들처럼 보이는 무용수들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사운드와 함께 몸의 이미지를 다층적으로 만들어낸다.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무용수의 몸은 특별한 관계나 서사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전한 몸이라기보다 신체의 파편들처럼 보인다. 이 공연에서 무용수의 몸은 최선을 다해 인간을 버리고자 시도한다. ‘흩어진 신체의 파편들’은 뒤로 걷거나 기어가거나 굴러다님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사람의 몸이 아닌 어떤 덩어리로 인지하게 하며, 결국 무용수들은 인간을 잃고 물질적 몸으로 환원되어 몸의 여러 가지 물성들을 구현해 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몸의 일부, 환원된 ‘기관’들은 금속성의 소리와 어우러져 공연 전체를 경관화(景觀化)한다. 〈내가 물에서 본 것〉에는 기계적인 사운드로 구성된 청각, 무용수의 몸이 서로 엉켜들어 올리거나 집어던지는 촉각, 집어던지는 계란으로부터 촉발된 비릿한 후각과 같이 다양한 감각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이 감각들은 서로를 딛고 서사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감각 그 자체를 이미지화한다. 감각은 서사적으로 서로를 잇는 대신 개별적인 장면, 이미지들의 중첩을 형성하므로, 춤의 서사 대신 이미지의 서사가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전체를 관통한다.




드라마터그를 맡은 윤민화는 이 공연의 제목, 〈내가 물에서 본 것〉에서 ‘물(matter)’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중적인 의미를 공연의 핵심으로 설명한다. 명사적 의미에서 ‘물질(matter)’로서의 의미와 동사적 의미에서 ‘물의를 빚다(mattering)’의 의미가 ‘물’이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서 교차됨으로써, 몸의 물성이 문제를 일으키는 장소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무가 김보라는 “몸과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는, 경계 없는 영역을 대하는 몸의 태도”로서 질문을 제기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몸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 “성별, 나이, 지역, 인종 등 보편적 기표로서 몸을 바라보는 관점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물에서 본 것〉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이 인간의 형상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점, 그리고 계속해서 낯선 사운드를 동원해 관객의 감각을 생경하게 만드는 장치적 국면과 연결된다. 중립적인 몸(Neutral state)을 통해 몸의 존재론적 질문을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안무가의 의도가 무대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물(matter)’로 돌아간 몸은 몸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아닌 것으로부터 출발해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결코 인간을 버릴 수 없다는 존재론적 제약을 갖는다. 극복하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존재하지 않으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것들을 만들어 왔는지 자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타자성을 통해 몸의 인간 너머, 포스트휴머니즘을 바라보고자 하는 〈내가 물에서 본 것〉이 (정치적) 몸을 포기하는 것은 논리적 서사에 구멍을 만든다. 몸이 물(matter)로 돌아갔을 때, 오직 물성으로만 구성된 몸은 우리 몸의 문제(mattering)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해체된 (환원된) 주체의 부분들이 주체 너머를 말하고 주체-세계의 이분법적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내가 물에서 본 것〉의 이미지들이 선명하고도 서늘한 몸의 타자성을 감각으로 전달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몸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전복하지 못하는 것은, 몸을 존재의 정동으로서 연결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비워내고 물성으로 환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모더니즘적 해체는 결국 몸을 몸으로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제약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서사의 빈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공허한 이미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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