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의 시선]은 현장 무용인들이 동료 무용가들의 공연을 쓰는 댄스포스트코리아의 새로운 비평 코너입니다. 무용인들의 전문 시선을 통해 공연의 이면과 작품의 가치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동시대의 춤을 새롭게 기록해 갈 것입니다.
포커스 [무용가의 시선]
Vol.127-2 (2026.3.20.) 발행
글_ 손인영(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사진_ 2026 ARKO ©Sang Hoon Ok
이은경의 작품 <세게, 쳐주세요>를 2월 27일 대학로 소극장에서 보았다. 프로그램 노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서 출발하여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무심한 방관자가 뒤엉킨 세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겨눈다. 그러나 자신의 뒤에 숨어 방관하는 나약한 인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당시 독일의 상황과 현재를 오가며 장면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상황을 스케치한다.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위트로 치환해 가볍게 풀어내려는 안무가의 의도는 작품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다. 테크닉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몸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리얼한 몸짓을 통해 형식적 틀을 비껴가며, 크고 작은 감정의 구조를 섬세하게 건드린다. 인간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탐색하려는 개념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무용수들은 특정 인물을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가해자·피해자·방관자’의 위치를 오가며 인간은 누구나 방관자가 될 수 있다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작품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홀로코스트 상황과 현재 인간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방관자’의 모습을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이러한 구조는 때로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서 ‘재미’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실험이 진행된다.


공연이 시작되자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무대에 등장해 중앙의 의자에 앉는다. 오페라 아리아가 흐른다. 또 다른 남자가 대형 펜치를 들고 등장해 의자에 앉은 남자를 때릴 듯 다가가다가, 이내 의자를 고치려 한다. 이 짧은 프롤로그는 작품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폭력의 가능성과 무력한 일상의 몸짓이 동시에 스친다.
이어 두 남자 무용수가 탁자를 들고 중앙에 놓고, 무용수 임종경이 바리톤의 노래에 립싱크를 한다. 두 남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움직임을 이어간다. 같은 공간이지만 무대는 갑자기 현재와 과거로 분리된다. 무대 뒤편에서는 나치 시절의 잔혹한 상황이 묘사되고, 앞쪽에서는 현재의 시선에서 그 시절을 회고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현재를 대변하는 남자와 과거를 연기하는 남자 사이에서 임종경은 한 남자의 지시에 따라 엎드렸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 움직임의 말투와 분위기는 의외로 희극적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끌고 가려는 안무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작품은 다시 무대 안에서 공연의 내부와 외부가 순간적으로 뒤섞인다. 임종경이 갑자기 작품에 대한 안내를 시작한다. 이러한 장치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까지 이어져 있더라도 그 기억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제3자의 시선이 드러난다.

이후 구조는 다시 세 사람의 관계로 전이된다. 서로 부딪치고 밀고 당기며 ‘너 때문이야’, ‘죽여 버릴 거야’, ‘나도 먹고 살아야지’ 같은 말들이 오간다. 죽이고 죽임당하는 상황이 희극적인 제스처로 표현되면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처리하지만, 당시 기억의 깊은 골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저점으로 남는다. 웃음의 순간마다 관객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세 사람이 뒤엉켜 한동안 밀고 당기다가 장면은 느닷없이 축제의 분위기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 전환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 하나의 과정이 축적되듯 이어지며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세 사람은 랩을 부르다가 어느 순간 홀로코스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축제의 분위기는 다시 엄숙해졌다가 이전의 밀고 당기는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너 때문이야, 죽여버릴 거야, 나도 먹고 살아야지’를 크게 외치며 뒹굴던 세 사람은, 어느 순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일어나 한참 서 있다. 관객들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며 기다린다.
이후 세 사람은 갑자기 옷 벗기기 게임을 시작한다. 앞선 내용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엉뚱한 전환은 작품 특유의 리듬을 만든다. 게임에서 걸린 사람은 옷을 하나씩 벗는다. 게임의 방식은 계속 바뀌고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게임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방관’이라는 주제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처리하려는 안무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어지는 총쏘기 게임의 끝에 전중권은 독일 군복을 입고 탁자에 앉고, 임종경은 팬티 차림으로 그 옆에 서 있다. 전중권은 O/X를 기록하며 자료를 정리한다. 그가 갑자기 ‘아!’ 하고 외치며 위를 바라보자 임종경이 그 동작을 따라 한다. 작은 제스처이지만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무용수들은 거의 발광에 가까운 춤을 춘다. ‘아!’라는 소리는 하나의 신호가 되어 길어지거나 짧아지고 반복되며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결국 큰 외침으로 끝나고 무대는 갑작스러운 정적에 잠긴다.
탁자 위에서 전쟁에 대한 대화가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전중권이 학생용 아코디언을 불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공간을 장악한다. 다시 분위기는 반전되어 흥겨운 음악과 춤이 이어진다. 그러나 곧 전쟁의 기억이 스며들며 우울한 음악이 무대를 뒤덮는다. 작곡가 라예송의 묵직한 음악은 작품의 철학적 무게를 유지하려 하지만, 깊이를 애써 피하려는 안무의 레이아웃 속에서 다소 희석된다. 완전히 가벼워지지도, 완전히 깊어지지도 않은 채 어딘가 어정쩡한 긴장 속에서 장면이 이어진다.
마지막 아이히만의 처형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의 억울함은 아코디언 소리로 치환된다. 그는 군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다가 결국 모든 옷을 벗고 인간 아이히만의 모습으로 남는다. 그리고 작은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무용수들. 장송곡에 가까운 음악이 흐르자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처럼 보이는, 그러나 어딘가 의미가 모호한 몸짓들이 무대 위에서 이어진다. 춤과 음악이 일부러 맞물리지 않도록 구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쯤 진지한 몸짓이 등장할 법한 순간이지만 안무는 끝까지 모호함 속에 머문다. 세 무용수는 고개를 숙이고 헐떡이며 서로 붙어 원을 그리듯 돌고, 처음 장면에서 등장했던 소프라노의 소리가 그들을 감싼다.
이 작품은 주제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회와 위트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낸다. 하나의 작은 소재를 발전시키고 그 끝에서 새로운 소재를 끌어들이는 구조, 그리고 느닷없음과 엉뚱함까지 갖춘 장면들은 작품에 독특한 재미를 만든다. 작곡가 라예송은 작품이 가진 철학적 무게를 유지하려 했지만, 진중함을 끝까지 끌고 가지 않는 안무가의 선택 때문에 후반부는 다소 어정쩡한 인상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춤의 나열을 피하고 소리, 게임, 스토리, 노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안무가의 열린 시각은 신선하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매우 흥미롭고 실험적인 공연이었다. 창의력이 무대 곳곳에서 드러났고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특히 독일 군복을 입은 남자가 기록을 체크하다 ‘아!’ 하고 위를 바라보는 장면은 추상이면서도 설명이고, 이미지이면서 의미 전달이 되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다만 후반부에서 감성이 풍부한 음악에 춤이 좀 더 긴밀하게 결합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다소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가슴으로 경험된다. 특히 개인으로서의 아이히만과 공적 존재로서의 아이히만의 삶의 궤적은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개념, 구조, 안무력, 실험 등 작품을 만드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라는 제어할 수 없는 신비와 환상은 그 어떤 기능적 완성도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 안무가 이은경의 실험성과 창의성에 더해 ‘감성’이라는 인간적 물성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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