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은 김용걸에게 ‘예술가가 예술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닥뜨리게 했다. ‘동시대 사회문제를 비판적으로 예술작품에 담아낸다’라는 것은 창작자들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창작의 오래된 동기지만 이것이 한국 발레 창작에서 분석할 가치가 있는 경향이나 전통으로 발현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의 발레 창작은 ‘한국의 전통을 서양예술인 발레에 이식한다’라는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접근에 치우쳐 있었고, 창작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동화나 소설, 아니면 실존 인물의 드라마틱한 일대기를 무대로 옮겨와 줄거리를 춤과 마임으로 재구성해 보여주는 선에 머물러 있었다. 발레의 공유동작(public domain)이 있다는 이유로 새로운 움직임 개발에 소홀하다거나, 줄거리 전달에 천착하느라 안무가의 철학이나 해석이 빠진 공허한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은 대중화를 위해 대중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유치하고 조악한 작품을 긍정하거나 발레 창작의 토양이 열악해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는 변명으로 귀결되곤 했다.
발레로 사회적 발언을 시작하다
김용걸이 2014년 9월 K발레월드의 폐막 공연으로 초연을 올린 <빛, 침묵 그리고…>는 발레 작품으로도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다는, 혹은 해야 한다는 선언 같은 작품이었다.
“4월에 발레협회에서 신작 의뢰를 받았을 때만 해도 작품에 대한 특별한 구상이나 콘셉트가 없던 상태라 뭘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러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는데, 사건 자체도 비극이지만 그 이후의 대응을 지켜보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어요. 이 사건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죠. 내가 혹시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흥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사건에 대해 파고들었는데, 알아갈수록 답답함과 분노가 커졌어요. 저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전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잖아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 비극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았죠.”
<빛, 침묵 그리고…> ⓒOk Sang-hoon
그해 K발레월드의 기자간담회에서는 발레계에서는 왜 발레의 예술적 측면에만 치중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질문은 그만큼 발레계가 ‘발언’에 소극적이었다는 반증이며, 물론 발레계의 문제만은 아닌, 민주주의를 무용실 문 밖에 세워둔 채 무용수들의 생각과 발언을 차단하고 몸을 움직이는 훈련에만 집중해온 우리나라 무용엘리트 교육 전체의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발언의 차단은 2016년 문화예술계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성폭력 고발 운동에서 무용계가 그토록 강고한 침묵을 지켰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안무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작품 제목에 ‘침묵’이 들어간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용수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제가 알게 된 사실들을 전달하기만 했는데, 제가 아는 만큼 이미 다들 알고 있었어요. 모두들 비극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이 지지부진함을 답답해하고 있었죠. 이 장면에서, 이 동작을 할 때 뭘 어떻게 하라고 따로 설명하지 않고 비극의 당사자가 되어보라고 주문했어요. 만약 내가 배 안에서 죽어간 학생이라면, 수학여행 보낸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고 했죠.”
<빛, 침묵 그리고…> ⓒHan Yong-hoon
선박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사고를 수습하고 원인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서야 하는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불신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동안 이 같은 공적 발화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무용수들도 많았다. 그는 아직 어린 무용수들이라서인지 겁을 내며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잘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 침몰하는 배에 갇혀 절망하는 연기로 객석을 울렸던 김희선은 이 작품으로 무용예술상 춤연기 부문의 최연소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라는 문장은 예술계에서 예술가의 발언보다 작품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지만 김용걸의 이 작품은 결국 “예술가의 작품은 곧 발언이다”라는 또 다른 문장에 가 닿으며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안의 ‘수치심’에 대한 차가운 응시
2016년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무대에서 선보인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은 <빛, 침묵 그리고…>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세월호의 비극은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문제 전반으로 확장되어 우리가 그동안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거나 혹은 가슴 한구석에 드는 수치심을 애써 외면한 채 방치해두었던 주제들, 학교 내 왕따, 종교인들의 위선, 일본 군위안부 문제, 동물권 등 다양한 주제들이 병렬적으로 무대 위에 펼쳐졌다 사라진다. 하나의 수치심이 지나가면 또 다른 수치심이 다가오는 식이다.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 ⓒBaki
“무대를 보시는 분들이 저게 무슨 뜻이야 하면서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공감하실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그래서 모두가 알 법한 이슈들로 무대를 꾸몄고 그동안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고 지나갔던 문제들에 대해 잠깐이라도 켕기고 찔리는 마음으로 돌아보시길 바랐어요. 심각한 주제였지만 작업은 즐거웠습니다. 영상도 이미지와 텍스트, 애니메이션을 다양하게 섞어서 집어넣고, 음향도 효과를 높일 방법을 고민하면서 편집하고요. 평소에도 배치나 배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작업하는 편인데 그런 편집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이 필요했던 작업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움직임이 주가 되는 무용을 시에 비유하는 이들이 많지만 <빛, 침묵 그리고…>나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은 시라기보다는 산문, 그보다는 르포에 좀 더 가까운 작품들이다. <빛, 침묵 그리고…>의 마지막 파트에서 돌출적으로 등장했던 구명조끼나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에서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 편집되긴 했지만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발화하는 영상은 작품을 우회적으로 경유하지 않고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우리가 ‘먹고 사느라 바빠서’ 외면했던 ‘수치심’ 드는 현실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장치들이긴 하지만 이를 보여주는 방식은 결코 ‘무용적’이지 않다. 이는 안무가가 시어인 움직임을 아름답게 정련하고만 있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인 동시에 작품으로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 안무가가 새롭게 고민해야 할 표현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김용걸 스타일 발레 에디톨로지
“지금은 나한테 안무는 뭐지 하고 생각해보는 타이밍인 것 같아요.”
김용걸이 파리에서 돌아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김용걸댄스시어터라는 단체명으로 공연 활동을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 그는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던 지난 몇 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이제는 조금 내려놓을 시기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제가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돌아보면 지난 10년간은 파리에서 활동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던 것, 꼭 하고 싶었던 것을 제 스타일로 실현시키는 데 집중했어요. 제 작품을 보고 킬리언 같다, 포사이드 같다, 그렇게 평가하시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카피라는 게, 카피하려고 노력한다고 카피 작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경험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해 아직 제 색깔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백조>
김용걸뿐만 아니라 해외 무용단체에서 활동하다 돌아온 안무가들이 발표하는 작품에서 표절과 모방 사이 어디쯤의 평가를 받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이는 안무가가 없다, 혹은 안무가를 키워야 한다라는 한탄이나 선언 다음 곧바로 공연화로 이행한 성급한 풍토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사업 중 하나인 ‘창작실험활동 과정과 공유’, 남산예술센터의 ‘서치라이트’ 정도를 제외하고는 안무자를 지원하는 사업들은 프로시니엄 무대에 올라가는 완성된 공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안무자들은 실험이나 실패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채 작품을 무대에 올려 완성도에 대한 혹평을 받고 이는 지원 사업 심의에 대한 공정성과 심의위원의 자질 문제로까지 비화되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교수가 ‘현대는 편집의 시대’라고 했는데,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보면 창조란 세상에 이미 있는 소스들을 새롭게 편집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스티브 잡스도 무에서 유를 만든 게 아니라 있는 걸 새롭게 디자인해서 보여준 사람이잖아요. 발레가 그런 것 같아요. 이미 있는 아라베스크 동작을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보다 아라베스크를 어떻게 사용하고 어디에 배치하느냐가 발레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산책>
위에서도 썼듯이 발레는 ‘공유동작’이 있는 장르의 특성상 현대무용만큼 움직임 개발에 적극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리서치 작업도 활발한 편이 아니다. 그래서 ‘편집’은 김용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지난해 7월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올린 김용걸댄스시어터 창단 9주년 기념 공연(공연명에 대해 김용걸은 정기적으로 공연을 해온 게 아니라 ‘정기공연’이라고 붙이기도, 10주년이 아닌 9주년이라는 숫자도 애매하다며 웃음을 보였다)은 김용걸이 ‘편집’으로 만들어낸 정찬 같은 무대였다.
<빈사의 백조>를 재해석한 솔로작 <백조>는 〈Work〉 시리즈에서 이어가고 있는 클래식 발레의 기본과 새로운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며, <오네긴>에서 영감을 얻은 2인무 <산책>은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홍정민과 김지영,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과 손유희 등 발레리나들의 애정을 받으며 공연을 거듭할 때마다 스스로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선보인 신작 〈Silence wasn’t empty?〉에는 그동안 안무를 해오며 가장 큰 영향을 받고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안무가인 포사이드에 대한 존경이 담겼다. ‘편집’이 과정인 동시에 결과인 그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 셈이다.
〈Silence wasn’t empty?〉
하지만 ‘편집’으로 만들어낼 ‘김용걸 스타일’에 대한 고민은 아직 진행 중이다.
“발레 무용수들은 레퍼토리가 없으면 한 가지 포지션만 계속 해야 해요. 평생 32회전 푸에테만 돌다 보면 그게 전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만큼 발레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작품을 경험하기가 어렵고 무용수들에게 주어지는 레퍼토리의 폭이 넓지 않으니까요. 킬리언이나 포사이드, 노이마이어… 무용수로 그들의 작품을 경험했다는 건 그래서 더 특별합니다. 발레 안에서 거기까지 다다랐다는 점에서 더욱 존경스러운 안무가들이에요. 제가 그런 안무가들의 대열에 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영향에서 벗어난 김용걸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10년 동안은 줄곧 달려오기만 했는데 그렇게 달리기만 하다 보니 오히려 결실다운 결실이 없는 것 같아요. ‘김용걸 스타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Silence wasn’t empty?〉
존경하는 안무가에게서 영향을 받고 또한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안무가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나초 두아토는 2014년 유니버설발레단의 <멀티플리시티> 공연을 위해 내한했을 때, 자신을 항상 따라다니는 이어리 킬리언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바 있다.
“이어리 킬리언과 헤어진 지도 24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서 춤을 배웠기 때문에 작품에서도 그의 영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마 평생 그의 영혼이 나를 쫓아다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이나 캐릭터 면에서 분명 나만의 독립적인 개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아토의 대답처럼 김용걸도 그 자신이 존경한다고 말한 킬리언이나 포사이드 같은 거장 안무가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존경하는 안무가에게서 한 걸음 더 떨어져 자신의 걸음을 내딛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그가 내놓을 다음 작품이 ‘김용걸’이라는 과정의 어디쯤이 될지 지켜보는 것 역시 그만큼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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