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무가가 공간 다자인을, 건축가가 안무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가능한가에 대해 막연한 의문을 품었던 적 있다. 어느 날은 잠결에 그것을 떠올려 보다가, 스스로 그 엉뚱함과 얼토당토않음에 놀라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그런 돌연한 생각은 애초에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언젠가 어느 사진에서, 가파른 모양의 무대 위에 서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배우를 보았다. 그 장면은 구조물의 경사를 이용한 다양한 움직임을 연상케 했다. 몸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간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공간의 형태⋅기능은 필연적으로 몸의 움직임에 영향을 끼친다. 만일 어떤 건축가가 공간 조형을 통해 움직임을 디자인하려 한다면, 그런 실험 속에서 안무가로서의 일말의 가능성이 성립하지 않겠는가 상상했던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상상해 보았다. 안무가는 어떤 건축적 결과를 유발할 수 있겠는가. 공간 디자인은 팔, 다리를 뻗을 수 있는 범위 등 인체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하곤 한다. 따라서 몸은 공간 기획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일상성을 넘어 예술적 의도가 담긴 움직임을 뼈대로 하는 공간을 발명한다면?
정합성을 결여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것은 내가 무용과 건축 사이의 관계에 호기심을 품게 된 출발선이었다. 그 출발선에서 나아가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차, 작년까지 국립현대무용단 무용수로 활동했던 조형준의 소식을 접했다. 그가 앞으로 안무가로 활동하려 한다는 것, 특히 건축과 무용을 교차시키는 작업에 뜻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나는 그를 찾아가, 대화를 청해 보았다.
김보슬: 그동안 국립현대무용단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무대 보여 주었다. 단원으로서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 축하드린다. 앞으로는 무용수에 머물지 않고 안무를 할 것이라 들었는데, 그 동기부터 궁금하다.
조형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안무를 해 온지는 꽤 오래 됐다. 처음에는 그럴 전혀 생각이 없었다. 움직임에 대한 무용수로서의 발전에만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등 떠밀리듯 안무를 시작하게 됐다. (웃음) 정영두 안무가가 이끄는 두 댄스 씨어터라는 팀에서였다. 2013년에 그 팀과 LG아트센터의 협력으로 장소특정적 공연을 만들었는데, 몸과 건축을 주제로 하는 것이었다. 팀 내 네 명의 안무가가 각기 다른 네 곳의 장소에서 그 장소성을 반영하여 안무를 하고, 공연 시 관객들과 함께 현장을 투어하는 형식으로 작업을 펼친 것이다. 그 네 개의 장 중 하나로 <좌표화된 로비>를 만들게 됐고, GS타워 로비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김보슬: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했나. 처음이라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조형준: 하기로 하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리서치에 어려움을 느꼈다. 이전에는 안무를 연상하면, 할 수 있는 동작들을 엮고, 눈에 띄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건축물 안에서 춤을 춘다고 건축과 무용의 접목은 아닐 것이다. 나는 책을 찾고, 주변의 건축가에게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설치작업을 맡았고, 우리는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에서 출발했다. 대화 속에서 접점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의 분야를 잘 몰라서 헛소리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웃음) 그런데 무용과 건축 간에 대표적인 공통점은 공간과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요소로서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건축에서 공간만 있을 수 없고, 무용에서 사람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안무에도 건축적 기법을 적용해 보면 어떨까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리서치의 가닥을 잡았다.
김보슬: 나는 대학에서 실내건축을 공부했는데, 건축에서 인체와 움직임은 공간 설계의 척도가 되더라. ‘휴먼 모듈(human module)’ 따위의 빈번한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무용이 다른 무엇보다 건축과 만나는 방식에 흥미를 느낀다. 당신은 평소, 무용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조형준: 극장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극장에서는 무대와 객석, 무용수와 관객의 이분법이 있지 않나. 고정된 자세와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다. 왜 꼭 한 군데 앉아서 봐야 하는지, 왜 때로는 침도 삼키기 힘든지 등의 물음이 불가피했다. 억지스럽고 강압적인 공존을 경험하는 곳이다. 극장 공간은 환상을 만들기 위해서 최적화된 장치일 테지만, 바로 그런 주장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바람으로 다양한 공간을 사유하게 됐다.
김보슬: <좌표화된 로비>는 어떤 작품이었나. 구체적인 안무 과정도 궁금하다.
조형준: 공연 장소로 LG아트센터에 있는 공간들을 활용해야 했다. 평소에 관객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라든지. 공연 장소를 정하기 위해 답사를 다니다 보니, 지하철역에 내려서 꼭 GS타워 로비를 가로질러 LG아트센터로 가게 되더라. 그래서 그곳도 극장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로비가 재미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일단, 로비는 사이적 특성이 있다. 완전한 외부도, 내부도 아니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공간이면서, 지극히 실용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움직임을 부여 받는지를, 날마다, 때로는 온 종일 시간대 별로 관찰해 보았다. 행동의 패턴과 흐름이 읽히더라.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그곳을 단순히 통과하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중앙을 가로지르는 반면, 누군가를 기다린다든지 대기 중인 사람들은 로비 가장자리에서 편안한 영역을 확보한다든가… 그 시기에 또 영감을 받았던 게,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한 개 씩 동떨어져 있으면 일행이 떨어져 앉는 모습이었다. 그 때 그들 사이가 어쩐지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건너편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모르는 사람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선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선, 동선에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GS타워 로비 바닥을 보면, 타일 귀퉁이마다 점무늬가 박혀 있었는데, 로비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사방연속의 점들이 마치 좌표와도 같았다. 이 점에 착안했다. 로비에서 찾은 좌표를 연습실에 그대로 옮겨와서, 무용수들로 하여금 재현된 로비를 체험하게 했다. 로비에서 일어날 법한 일상적인 모습들을 기초로 움직임을 취해보고, 실제 로비를 통과할 때처럼 자유롭게 자신만의 동선을 만들게 했다. 그렇게 좌표 위에 동작을 입힌 다음, 트레이싱지에 각각의 동선을 그리고 나니, 서로 다른 레이어(layer)들이 생성됐다. 그리고 그것들을 겹치거나, 콜라주처럼 이어 붙이는 변형 과정을 통해 약 아홉 가지 유형의 동선을 도출했다. 그것을 다시 로비로 가지고 와서 무용수들이 각각의 동선 위에서 퍼포먼스를 펼쳤고, 보행인들은 움직이는 퍼포머들과 더불어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관람하기도 했다. 일부러 보러 온 관객들도 있었지만, 우연히 그곳에 있었던 관객들도 공연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약 13분 정도의 짧은 공연이었고, 단순한 구조만 가지고 만든 것이었지만, 건축적 작업방식을 안무 작업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해 보고 나니 계속 안무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에 대한 관심도 더 생겼다.
[사진 1] <좌표화된 로비>(2013)
김보슬: 그런 생각은 이후 어떤 작품으로 이어졌나.
조형준: 이듬 해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둘이 된 순간*Di·a-meter>이라는 공연을 하게 됐다. 여기서는, 전시를 보는 것처럼 공연을 보게 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미술관은 원래 전시를 하는 곳인데, 공연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이려면 어떡해야 될까, 전시와 공연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공연의 시간은 선형적이고, 전시의 시간은 비선형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둘이 완전히 반대다. 전시의 시간은 끊어져 있다. 전시를 보다가 아무 때나 나갈 수 있고, 다른 볼일을 보고 돌아와도 되고, 언제든 처음부터 봐도 된다. 관객의 선택에 의존적이다.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공연을 만들고자 했다. 짧은 열 두 개의 챕터로 구성했는데, 전시처럼 보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정한 크기의 스티로폼 박스들을 가지고 이들을 쌓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간을 활용했다.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무대전환을 통해서 공간감, 거리감, 시야 개폐를 새롭게 변형했다. 역시 로비에서 했고, 1층에 내려오면 공연자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었고, 2층에 올라가면 공연 장면을 내려다보게 되기에 좀 더 평면적인 관람도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좌표화된 로비>에서보다 거리(distance)에 대한 생각들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리적 요소들을 어떻게 배치하는지에 따라서 무용수들 간의 관계, 무용수와 관객 간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험했다. 이번에도 바닥에서 힌트를 얻었다. 바닥에 그리드 형태로 점들을 찍어, 마치 수학의 마방진처럼 그 점들 간에 패턴을 찾을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지난번에는 좌표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으로부터 유형화된 동선을 추출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점들을 사용해서 유형을 먼저 만들고, 조합하고, 무용수들이 점들을 외워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실행했다. 2015년에 문화역서울284에서 발표한 <다섯 가지 장소>는 무용수를 둘러싼 채로 닫혀 있는 공간이 서서히 열림에 따라, 관객도 대상을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차츰 멀리서 관조하게 되는 공연이었다.
[사진 2, 3] <둘이 된 순간*Di·a-meter>(2014)
김보슬: 안무가로서 꾸준히 건축적 문법에 골몰했음이 느껴진다. 특히 거리(distance)의 언어. 내가 아는 건축가 친구는, 국회의사당의 좌석 배치와 그 간의 거리에 따라 의사결정 속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할 계획이다. 안무가도 비슷한 지점에서 고민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 밖의 많은 고민들을 가지고 작업해 오는 동안, 안무 리서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게 되었는가.
조형준: 리서치에 대한 진지함이 높아졌다. 움직임을 만드는 구조와 방법이 과연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생각해 보니, 중요하더라. 예를 들어… 우리가 멋진 건축물이나 자연 경관을 볼 때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을 알아야만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다. 현상 이면의 과학적 원리라든지 생성 과정을 모르고도, 수용자는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기반 하여 얼마든 감상할 수 있다. 볼 때는 모르고 봐도 되는데, 만들 때는 알고 만들어야 한다. ‘어쩌다 있게 된 것’이 아니려면, 어떤 틀과 원리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안무 또한 예외가 아니며, 움직임을 유도할 수 있는 물리적 구조를 짓기도 했다. 무용수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 그런데 '몸으로 이게 돼?' 싶을 만큼 낯설었던 동작이 어느덧 내 몸에 익어 있는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 대단하지만, 움직임을 이런 구조들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재밌다. 요즘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행하는 듯하다. 처음에는 물리적 구조를 사용하는 것에 관심이 치중해 있었다면, 최근에는 현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가령,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벽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리적 경계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벽'처럼, 움직임으로 그런 인지적 요소를 만들어 낼 수 없을까, 감각적으로 공간을 설정할 수 없을까 하는 의문들을 품게 됐다. 2016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연한 작품은 이런 맥락과도 닿아있다.
김보슬: 그게 어떤 작품이었나.
조형준: 제목이 <오버 더 월(Over the Wall)>인데, 작년에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원예술프로젝트 공동 기획 안에서 발표했다. 건축적 실체로서의 벽(wall)을 개인이 어떻게 경험하는가, 그 경험이 공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다루었다. 배치에서 해방된 상태, 의도치 않은 것들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오랫동안 모든 움직임을 물리적 구조의 조작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었는데, 갈수록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김보슬: 외국어 번역으로 치면, 번역 불가능한 지점과 같은 것인가.
조형준: 그렇다.
김보슬: 무용 비전공자로서, 무용 교육 현장에서 안무 교육이 비중 있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학교 다닐 때 어떠했는가.
조형준: 내가 배운 커리큘럼은 실기에 치중해 있었다. 안무 교육을 따로 받았다기보다는, 선배의 스타일을 관찰하고, 흉내 내는 것 위주로 안무를 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안무가 과연 교육될 수 있는 것인지. 교육이라고 해도, 예시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안무법이란 결국 의도하는 작품에 따라 스스로 찾기 나름이고, 각자 달라야 한다. 안무리서치는 배울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자신만의 안무법을 찾는 것 그 자체가 아닐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서치는 중요하다.
[사진 4] 인터뷰 중
김보슬: 그렇다면 리서치를 할 수 있으면, 타 분야 출신도 안무가가 될 수 있을까.
조형준: 그럴 것이다.
김보슬: 드라마트루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조형준: 나에게 있어 드라마트루그는 백과사전 같은 역할이다. 내가 모르거나 간과하는 지점들을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리서치를 자문해 주고, 나와 피드백을 주고받는 사람이다. 내 경우, 이제까지 함께 작업해 온 건축가가 드라마트루그인 셈이지만, 꼭 특정 분야에 국한될 이유는 없다.
김보슬: 안무적 영감을 얻거나 활력을 얻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있나.
조형준: 독서를 하는 편이다. 잡다하게 읽는다.
김보슬: 2017년도의 계획은.
조형준: 1월 중순부터 6개월 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에 입주한다. 작년 말에 했던 <오버 더 월(Over the Wall)>은 최근의 관심사를 반영한 것인 만큼, 아직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좀 더 발전시킬 예정이다.
조형준
1984년생. 무용수, 안무가. 성균관대학교 졸업. 두 댄스 씨어터(Doo Dance Theater)에서 활동하며 <프로메테우스의 불>, <제7의 인간> 등에 출연. 국립현대무용단에서 활동하며 <이미아직>, <어린 왕자> 등에 출연. 현재 프로젝트 뭎에서 활동 중.
글_김보슬(자유기고가/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전공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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