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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파티 〈옛날 옛적에〉 - 전통사물로부터 귀납된 춤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나타나는 전통에 대한 인식은 예사롭지 않다. 전통을 타개하거나 숭상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떠오르는 잔상들을 담대하게 응시할 뿐이다. 서구 세계가 경탄하는 ‘신비로운’ 유물들 대신에, 그는 ‘요강, 망건, 장죽, (...)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의 폐물들에 향수와 애정 어린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에 착안한 어느 미술 전시( <앉는 법>, 2016, 이영욱 기획)가 있었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관람한 고블린파티(Goblin Party)의 신작 공연 <옛날 옛적에>(2016 창작산실 무용부문 우수신작)는 그것의 꼬리를 물고 전통의 예술적, 현대적 구현을 상기시켰다. 출연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곰방대, 갓, 도포, 부채, 장구, 상투 등의 사물과 소재는 강박적으로 계승해야 하거나, 혹은 미개한 것으로 폄하해야 할 전통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전통의 이름 때문에 미처 호명된 적 없는 무엇으로서 재인식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착각일까.

 공연의 세 공동창작자 겸 출연자인 임진호, 지경민, 이경구 중에서 지경민과 이경구를 만나 <옛날 옛적에>의 안무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 작품에 두었던 한 가지 혐의를 밝히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김보슬 : 신작에 대한 인상이 깊었다. 관람하면서 <거대한 뿌리>라는 시가 떠올랐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어도 좋다”고 말하는데, 의외이지 않나. 전통이라고 무조건 다 좋을 리가. 그런데 김수영처럼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시인이 더러운 전통을 덮어놓고 좋다고 하니, 일단 놀라게 된다. 그래서 그 말을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식민시대를 통해 서구적 가치관을 계승하면서 우리 스스로 ‘더러운 전통’이라 여겼던 것들, 가장 한국적인 삶의 시시한 파편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긍정한다는 뜻이 아닐까. 
  <옛날 옛적에> 또한 이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는지 궁금했다. 한국적인 동시에 대수롭지 않은 사물들을 이용한 다양한 움직임의 전개를 보았다. 컨템포러리 장르에서 ‘전통의 현대화’, ‘한국적 컨템포러리’ 등의 어휘가 등장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런 용어 속에서 전통과 한국성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바라보는 태도가 있지 않은가 싶다. 혹시 그런 태도에서 벗어나려던 것은 아니었나. 

지경민 : ‘우리는 깊이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내가 자주 한다. 정말 그렇다... 전통에 대한 고민이나 거창한 생각은 없었고, 엉뚱하게도 무용의상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공연에서 특별히 디자인한 의상을 입지 않는 편이다. 평상복을 입는다 해도 우리 공연에 별로 차이가 없는데, 공연 며칠 전에 의상을 가봉하고, 아끼며 걸어놓고, 거기에 큰 비용까지 들이는 것이 과연 꼭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의상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일상적인 옷으로 무대 의상을 대신한다. 그렇게 해 오다 보니 어느 순간 정 반대로, ‘특정한 의상을 계속 입고 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복을 떠올렸다. 우리가 입어 본 한복은 매우 불편했다. 쇼케이스를 하기까지 8개월 동안 내내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디에 걸리지 않고 제한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낯선 옷에 몸을 적응시켜 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는 곧 리서치였다. 꾸준히 그걸 입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 말이다. 한복을 입은 채로 공연을 하기로 마음 먹고 난 뒤에, 그렇다면 제대로 불편하게 아예 갓까지 쓰자고 했고, 마땅히 연상되는 소품들을 수집하기에 나섰다. 



[사진1] <옛날 옛적에>(2016)

  곰방대는 경구 씨 아이디어였다. 국악사에서 불현듯이 그걸 사자고 하기에, 그럼 책임지고 쓸모 있게 만들 것을 주문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작품 콘셉트와 움직임을 결정짓고 그에 맞춤한 소품을 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개 그 반대다. 특히 이번 <옛날 옛적에>는 한복을 입고, 그로부터 연상되는 물건들을 모은 다음, 최대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심히 갖고 놀았다. 부채로 예를 들면, 어떡하면 이 부채가 매력적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접힌 부채의 불쌍하고 시무룩한 느낌에 착안해, 접힌 상태 그대로를 집중시키는 움직임들을 찾고자 했다. 그 씬의 이름을 우리끼리는 ‘펴지지 않는 부채’라고 부르는데, 너무 유치해서 남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사진 2] <옛날 옛적에>(2016)

이경구 : 이 작품을 발표한 이후에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전통을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표현했어요?’였는데, 앞서 말했듯 전통과는 무관한 출발이었다. 아주 작은 물음을 집요하게 따라간 결과, 예상치도 않았던 ‘전통’이라는 지점에 이르러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김보슬 : 의상을 가지고 무얼 해 볼 수 있을까 하다가 찾은 게 우연찮게도 전통 의상이다 보니, 자연히 한국적 소품으로 관심이 옮아간 것. 그 소품들을 뜯어보고 실험하는 중에 불쑥 불쑥 표출되는, 내면화된 전통을 발견했을 것 같다. 


[사진 3] <옛날 옛적에>(2016)

이경구 : 그렇다. 부채나 갓 같은 물건들을 전통무용 공연에서는 계속 같은 방법으로 쓰고 있고, 실제로도 옛날 사람들이 쓰는 방법은 그러했을 텐데, 만일 우리가 무용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혹은 한복을 처음 입거나 한국 물건을 처음 다뤄보는 외국인이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 또한 애당초 계획했던 것이 아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도들 가운데 맞닥뜨린 우연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주제에 어떻게 접근했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일관된 답을 하기 어렵다. 

지경민 : 그래서 우리가 너무 가볍다고 자평하는 것이다... 

김보슬 : 만드는 입장과 감상하는 입장의 간극을 실감한다. 공공연히 ‘한국적 특색’을 강조한 여느 작품보다 훨씬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며 보았는데, 정작 만드는 과정에서는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별로 개입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지만, 전통의 표제를 이끌어낸 결과물의 배면에 그럴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한국적 현실을 토대로 한 한국인의 상상력으로 수렴하지 않는가. 앞으로 이 작품을 좀 더 발전시켜 다시 무대에 올릴 기회가 있다면, 그 점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읽히게 하는 것은 어떨는지. 답습적인 ‘전통의 재해석’을 시도한 작품이 아님에도 더 강하게 전통을 소환한다는 점을 말이다.
  작품에서 음악을 담당한 “헤미”(Rémi Klemensiewicz) 이야기를 해 보자. 최근 한국에서 여러 공연을 통해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외국인이라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가 공연마다 비슷한 연기, 연주를 보여준다고 비판하는 관객도 있던데, 그를 출연시킨 이유가 있나. 

지경민 : 원래 프랑스에서도 예술작업을 했던 그 친구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서 이곳에 왔다고 한다. 예술 분야와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보니, 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꽤 많은 대화를 했다. 외국인이 우리 작업에 참여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도 사실은 있었다. 그런데 그와의 대화가 작품의 방향을 상당 부분 명확하게 했다. 개념적으로 분열하며 갈피를 못 잡던 우리에게, 그가 오히려 중요한 단서를 제시했다. “나는 한국과 한국적인 것이 너무 좋아. 그런데 너희에게 한국적인 것은 뭐야? 한국인들은 서구의 시선을 매혹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그것들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해. 왜 타인의 시선에서 너희를 발견해야 해?”라며 그가 격앙했다. 

이경구 : 그리고, 단지 프랑스에서 왔다는 이유로 자신이 서구적 가치관에 무조건 동의할 것이란 기대가 불편하다고 했다. 자기는 서양인이니까 한국 기성대세의 가치관에 비판적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선입견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한국적 삶으로서 명맥을 이어온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오로지 구태의연하기만 할 리가 없다’는 요지를 아주 논리정연하게 펼치더라. 듣다 보니, 우리가 미처 언어적으로 표명하지 못하고 있던 작업 의도를 그대로 말하는 듯했다.

지경민 : 재미있지 않나.

김보슬 : 그렇다.


지경민 : 그래서 그에게 음악만 맡기지 말고 아예 무대에 등장시켜서, 그의 출연을 통해 어떤 효과를 구현해 보고자 했다.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이 직접 이런 생각을 말로 건네면 관객에 개념 전달도 잘 되고, 흥미도 유발할 것 같았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그가 무대공포증이 심해서 무대 위에서는 매우 말이 어눌했다! 버벅거리며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어 놓고 들어갔다.

김보슬 : 연기인 줄 알았는데... 그럼, 음악은 다 그가 만들었나.

이경구 : 내 솔로 씬에 나오는 국악 선곡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사진 4, 5] 인터뷰 중

김보슬 : 소품에 기반한 몸짓, 특정 사물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다고 짐작되는 움직임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북을 발뒤꿈치로 차던데. 그건 어떻게 나왔는지.

이경구 : 일단 우리들 각자, 악기를 잡고, 그러고 보니... (웃음)

지경민 : 정말 막막했다.

이경구 : 오랜 고민 끝에 누군가 무심코 북을 발로 찼고, 바로 이거다! 했던 것이다.

지경민 : 발로 북 중앙을 정확히 명중시켜 보자, 손은 절대 쓰지 말자, 따위의 여러 가지 제약을 두고 달리 차 보면서 새로운 동작들을 만들고, 주제와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되는 장면을 찾으려고 했다.


김보슬 : 나름의 방법으로 리서치를 하고 있지만, 아직 방법적으로는 즉흥성과 우연성에 기대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낯선 도시에서 지도 없이 목적지를 찾아 나서는 것에 빗대도 좋을까. 혹은 수많은 관찰 결과들을 모아, 모아서 결론에 이르는 귀납적 추론을 닮았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앞으로 목표하는 안무법이 있다면 듣고 싶다.

지경민 : 어떤 일화에 비유해 보겠다. 어느 날 경구 씨와 그의 친구가 나를 초대해서 밥을 차려 준 적이 있는데 차림이 정갈하고, 식기랑 식탁보도 너무 예쁘고, 정성이 듬뿍 느껴졌다. 그 날 메뉴가 카레였는데 먹어보니 맛까지 일품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우연히 쓰레기통을 보았더니 3분 카레 포장이 버려져 있는 게 아닌가! 안무에 대한 내 생각을 닮은 사건이었다. 음식의 재료가 아무리 흔하고 저렴한 것이라고 해도, 그 정성이 맛있지 않았던가. 음식 뿐 아니라 안무에서도, 우리는 정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쉽게 나온 아이디어는 일단 의심해야 한다. 
알다시피, 안무가들이 무용수 출신인 경우가 많다. 움직임 면에서 어마어마한 트레이닝을 거친 사람들이고, 그렇다 보니 숙련된 움직임 자체를 안무적 성과로 간주하기도 하더라. 그런데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주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하고, 고유의 언어도 개발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러한 것들 밑바탕에서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김보슬 : 움직임을 고안하는 건 실증적인 차원의 일인데, 정성껏 움직임을 만든다는 게 어떤 것인가.

지경민 : 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걸 찾으면 쉽게 놓아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기 좋고 재미있는 것 위주로 동작을 짜 본 적도 있는데, 그러면 다음 날 그 동작이 돌연 시시하고 공허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오래 숙고할 수 있는 어떤 계기 하나를 포착해 물고 늘어지면, 거기서 나오는 움직임의 변용들이 질리지 않더라. ‘하나 하나, 꾸역꾸역 만든다’고 우리는 표현한다. 예를 들면 내가 옆 사람 팔을 잡아당김으로써 그의 머리가 이리로 따라오니까... 따라오는 머리를 반대 손으로 막고, 그러면 내 팔꿈치가 들리니까 이 틈으로 내 머리가 들어가고.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한 획씩 꼭꼭 눌러쓰듯이) 만들다가 때로는 속도가 붙기도 한다. 이렇게 찾아내는 동작들은 마치 자식과 같아서, 몸에 안 맞는다는 생각으로 쉽게 집어던질 수 없다. 각각의 계기에 생각을 오래 묶어둔다.


김보슬 : 경구 씨는 어떤가.

이경구 : 이제껏 내가 보아 온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나 이 만큼 했어요’ 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창작을 하면서 이런 태도를 경계하지 않으면 ‘삶의 고뇌’, ‘반복되는 삶’ 등 진부한 주제에서 탈피하기 어려워진다고 본다. 관객은 누군가가 노력한 시간, 고민한 흔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상의 것, 그 바깥의 것에서 다양한 주제를 발굴하고 보여 주는 것이 나의 목표다. 때문에, 내가 연마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공연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마음은 일찌감치 떨쳐 버렸다. 나중에 나이가 들더라도 이 점에 변함이 없으면 좋겠다.

대화를 마치며 시의 한 대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전략)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후략)

<거대한 뿌리> 중

시인은 무수한 반동들로 지탱되는 전통에서 거대한 뿌리를 본다. 비록 깨알 같고 파편화돼 있지만 변모와 흐름을 거듭하는 전통은, 무수한 잔뿌리들을 내려 커다란 망을 이루는 뿌리처럼 하나의 결집체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 젊은 안무가들이 파편화된 관찰, 시도, 성취 그리고 그들 간의 연쇄를 통해, ‘무수한 반동’을 통해, 거대한 뿌리로 승화할 것을 기대한다.

고블린파티
컨템포러리 댄스 그룹 고블린파티(Goblin Party)는 2007년 창단된 이래, 
<구제>(2017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인지원사업 닻), 
<옛날 옛적에>(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신작, 2016 아부다비 한국문화원 초청작), 
<불시착>(2015 서울아트마켓 폐막식 초청작, 2014 러시아 Korean dance week in Russia 초청작), 
<아이고>(201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SPAF 초청작, 2014 독일탄츠메세 초청작), 
<혼구녕>(2014 국립현대무용단 전통의 재발명 전) 등을 발표해 오며, 현재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 
2017 한국춤비평가협회 <옛날 옛적에> 베스트작품상, 2015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 SCF <낯가림> 해외심사위원특별상 등 수상.

<옛날 옛적에> 공동창작자: 지경민 · 이경구 · 임진호


글_ 김보슬(자유기고가/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전공 M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