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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김윤수와의 만남 - 현대화된 한국춤의 고민 1

 국립무용단 무용수,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 등을 거쳐 현재 정동극장(경주)에서 안무가로 활동 중인 김윤수 무용가를 서울 용산구에 소재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한국무용’을 추고, 만드는 그와 대화를 가졌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대화 중 던져진 질문들은 즉각 대답으로 돌아오는 대신, 한국의 춤 사회에 관한 대주제로 선회하기도 했다. 질문을 비껴 멀리로 천천히 돌아오며 원근감을 형성하는 그의 답에서, 예술가로서 살아내야 하는 커다란 고민의 원을 어렴풋이 느꼈다.

김보슬: ‘발레-현대무용-한국무용’의 삼분법이 바람직하지 않다지만, 한국인이 추는 춤 일반이 아닌, 세부 장르로서의 한국무용에 대해 묻겠다. 한국무용은 발레와 마찬가지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수되고 다듬어진 동작과 원칙들에 기반하기에 한국무용 안무는 태생적으로 어떤 한계를 지니고, 기존의 동작을 가지고 순서나 연출의 변화를 만드는 수준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할 운명에 처해있지 않은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기존의 것을 전복하고 타파해야 할 사명에서 비롯한 컨템포러리 장르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동작을 실험하고, 의식과 행위를 개발하고, 그것을 목표로 리서치를 수행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지 않을지.
 지난 세 차례의 연재에서 현대무용 안무가들을 다룬 후, 이번 호에서는 한국무용 안무가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다. 한국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

김윤수: 나라와 국민이 물리적 공간, 시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파생되는 공통된 언어, 약속들, 복식, 음식의 섭취 방식, 일정한 동작의 의미, 이런 것들이 흔히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이고, 춤도 그 중의 하나다. 문화적으로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이 반도에서 자리 잡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그리고 그 특수성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생긴 희소적 가치… 이런 것을 다져온 우리 민족이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서 시달려 온 외세의 침략… 국력이 약해지다 보니까 문화적으로도 주권을 빼앗긴 근대가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춤도 공격을 받았다. ‘너희들이 나라로서 약자가 되었으니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도 열성한 것, 근대화된 국제 사회의 흐름을 쫓아오지 못하는 구시대적 문화 유물, 따라서 너희들의 것은 천하고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을 일제가 우리에게 세뇌하지 않았던가. 문화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사회적 거울로 기능하고 작가의식을 반영한 작품을 생산하여 국민과 함께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기반 자체를 일본이 끊어놓았다. 그 틈에 우리는 작자 미상인 한국춤을 추어 왔다. “예술은 너로부터 출발하고, 너에게서 끝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진 개념예술로서의 현대무용에 비해, 한국춤은 개념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렇게 추라고 하니까 추었던 것, 어느 날 어떤 시기, 어떤 절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추는 것으로 당연히 전래돼 온 것에 가까웠다. 양식이나 의식에 대한 당위를 알고 추는 춤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문화가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모습이긴 하다. 우리가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듯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고, 나아가 개인의 정체성의 일부분이 되는 것은 문화가 가지는 특징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춤을 왜 추는가’를 묻는 시대를 맞이했다. 그때 한국무용 하는 사람들은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컨대, 현대무용 하는 사람들이 “이 춤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나는 사회적 비판력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는데, 너희 한국무용은 그 꽃을 왜 들고 있니?”처럼 물었을 때 한국무용인들은 당혹했던 것이다. 들으라고 해서 들었고, 이렇게 들라고 해서 이렇게 드는 것이 예쁜 줄 알았고,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 기뻤는데, 왜 들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니 막막했다. 때문에,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극장용 춤을 추면서 양식적 실험, 작가적 실험을 하는 시기에 한국춤이 혼이 많이 났었다.
 물론, 한국무용에도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추는 춤, 그렇게 안무된 춤들이 많이 있다. 일무와 같은 제례의식도 굉장한 미학적 의식을 보여주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에 전수되는 과정에서 설명은 부족했다. 근대 이후 한국인에게 주어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춤을 발표하고 추어내는 것은 춤의 생산과 소비 과정, 관객의 대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극장을 활용하는 방법이나 시스템의 효율성 구현에 있어서도 다른 장르의 방식을 전수 받아야 했다. 즉, 현대무용을 따라하는 현상이 생겼다. 극장 도입 이래, 우리 춤은 현대무용과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면서 각자의 유일성을 획득해야 하는 이중과제를 안게 되었다.

김보슬: 요즘 활동하는 표상만, 김재승을 비롯한 여러 젊은 한국무용가들의 안무에서 컨템포러리 장르와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만일 한국무용에 현대무용적 안무 원리와 관객 소통 방식 등 적용되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무용’이라 말할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 있을까.

김윤수: 자, 발을 이렇게 뻗는 순간 한국무용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데,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한국적인 코드가 존재한다고 했을 때, 발 하나만 두고 그 춤을 한국무용이라고 보아야 할지, 현대무용이라고 보아야 할지 고민들을 한다. 그것은 춤을 추는 사람들, 작가들, 관객들, 또는 학자나 언론처럼 직업적 책무로 인해 춤을 분류하는 계층, 이 모든 이들이 공히 고민하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이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한국춤이 무엇인가,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두고 서로 대화해야 한다.
 2001년 국립무용단의 <마지막 바다>라는 작품에 조안무로 참여하면서 무용수들의 작품 이해도를 높이려고 고심하던 차, 퀴즈를 냈었다. “너희들이 추는 춤은 무엇이니?” 하는 물음에,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저는 한국무용을 합니다”, “한국춤 추는 아무개입니다” 하던 이들의 말문이 막히고 다들 주춤했다. “당신은 여자인가, 남자인가?”처럼 당연한 것을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퀴즈로 맞닥뜨리니 문득 자신이 없어진 것이었다. 과연 한국무용이 단순한 용어적 정의나 장르 구분을 넘어 그들 자신의 지식으로 존재해 왔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피상적 지식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체를 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흔한데, 무용 전공자들 또한 그렇다. ‘-학’ 자가 붙은 분야의 학도로서, 그 전공명에 대한 이해조차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왜 자신이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했고, “그럼 한국이 무엇이니?”부터 다시 묻자, 지역, 집단, 유전적 특성, 세대와 역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누구도 대답을 잘하지 못했었다.
 나는 이 일화가 한국무용가들의 흔한 문제점을 단편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정의 내리기 무척 어렵더라도 정의 내리려고 노력을 해야만, 자신이 제시하는 동작이 육체화되기 이전에 자신이 그것을 선택하려고 했던 의도 저변에 깔린 무의식에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의식이 의식화되어 공유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우리 스스로가 무슨 춤을 추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무용수들도 그런 지적 고민을 하고 있어야 작가진, 연출진과 함께 작품의 대본이나 안무방향 설정에 대해 진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
 당시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없었는데, 질문에서 언급한 표상만, 김재승 같은 이들의 작품에서도 동일한 의식을 느낀다. 자신들이 추고 있는 춤이 과연 무엇인지, 그 안에서 발견되는 모순이나 간극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연결해야 하는지, 실제로 후배들이 무척 갈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이 동시대적인(contemporary) 한국무용을 추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고통은 아니다. 한국무용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원죄적 고민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 어떤 장르에서건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압박감임을 잊지 말고,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진] (김윤수 안무, 2013)

 최근 한국무용가들이 발표하고 있는 현대무용을 닮은 한국춤, 현대무용과 상이점을 찾기 어려운 지점에 가 있는 한국춤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고 차라리 당연한 현상이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춤의 유산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 이전부터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도를 구축한 다음 자기 자신을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예측하지 못한 미래 시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현대무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아무리 자기 자신으로부터 춤이 출발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미 있었던 것들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기존의 현대춤이 존재해야만 자기 자신의 춤이 존재하는 공식이 성립된다. 그들도 작자 미상의 춤, 자기 이외의 춤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한국춤이 현대춤과 비슷한 외형이나 주제의식을 가지게 됐다고 해서 그것을 특이하게 여길 필요가 없고, 현대화된 한국춤을 선보이는 작가들만의 고민으로 볼 것도 아니다. 그건 예술 자체의 문제다.

김보슬: 예술가에게는 ‘어디까지가 한국무용이냐’ 하는 장르 구분 이전에, ‘내가 추는 춤이 어떤 춤이냐’ 하는 혼란과 불안이 있다는 것… 충분히 이해된다.

김윤수: 실제로 안무를 할 때에 연결고리를 만들기 힘들어지면 쉽게 현대무용 동작을 그대로 쓴다.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그 둘을 이어줄 수 있는 조사, 접속사 따위가 우리 춤에 없을 때가 있다. 예컨대, 현대무용에는 굴러서 다리를 돌리는 어떤 동작이 있고, 그게 ‘-의’, ‘-으로’ 처럼 기능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정작 우리한테는 그게 없으니 찾으려고 애쓰다가 지치면 현대무용에서 동작이나 요소를 가져다가 써 본다. 그리고 굉장히 조화가 잘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식이면 다행인데, 단지 허전한 곳을 메우려 다짜고짜 가져오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 춤이 작가적, 양식적 실험을 하던 과정에 생긴 실수였다고 본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건너온 금(琴)이 개량되어 우리 식의 거문고, 가야금으로 한국화된 것과 같은 사례를 춤에서 만들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대체할 만한 단어를 우리 스스로 상상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능력이 한국무용의 현대화를 주장하는 안무가들에게는 분명히 요구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을 못 갖추어 아예 현대무용 장르로 전향하는 한국무용가들이 있고, 나의 제자들 또한 고민하는 부분이다.


글_ 김보슬(자유기고가/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전공 M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