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수: 사실 앞서 말한 고민들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방향은, 작품이 소진되고 재생산되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내는 관객과의 소통인데… 그렇기에 작가주의적 정신으로 관객을 끌고나갈 것이냐, 아니면 거꾸로 친대중주의에 영합할 것이냐,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논하다 보면 작품에 따라 다른 태도를 택하며 변신을 하는 안무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안무가도 있다. 나는 변신을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작품을 관통하는 나의 일관된 안무 원칙은 음악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춤은 결국 음악에 대한 몸의 반응이고, 소리에 대한 주체자의 해석이라고 나는 정의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음악을 지극히 중요시한다.
작업할 때 음악을 먼저 준비하고, 수없이 듣고 나서, 안무를 해야 할 때가 오면 그때부터 음악을 듣지 않는다. 무용수들에게는 처음부터 음악을 전혀 들려주지 않고, 작품 개요와 대본만 제시한다. 그들도 음악과 소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주체들이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를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사진] <네 명의 무용수를 위한 거문고 산조>(김윤수 안무, 2016)
오감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들을 다 꺼 버리고 텍스트만 가지고 출발하니까 오로지 이성적으로 안무를 대할 수 있다. 거기에서, 철저하게 단위화된 동작들을 준다. 언어로 치면, 다양한 의미의 낱말로 조합되기 이전의 자음, 모음 같은 것들. 그리고 획 하나만 떼어 놓고 보았을 때 그게 알파벳 ‘I’인지, 숫자 ‘1’인지, 한글 모음 ‘ㅣ’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고딕체를 쓸 것이냐, 붓 자국이 느껴지는 궁서체를 쓸 것이냐, 하는 정도의 톤(tone)만 조절한다. 그걸 익히는 훈련만 한 달 반, 두 달 가량 진행한다. 다분히 건조한 방식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연습 분위기는 재미있다. 무용수들이 고민이 없으니까 편안해한다. ‘이 음악에 이렇게 반응하고 싶은데’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이 제거된 상태에서 안무가가 시범 보인 동작만 취하고, 그 형태만 유지하려 하니까 시각적으로 매우 예민한 상태가 된다. 안무가인 내가 획득하고 싶은 몸의 형상이 무용수들의 해석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리니까, 오히려 시각적 통일이 잘 된다. 그런 다음에 음악을 들려주면서 연습한 단위화된 동작들을 의미 체계로 합치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로 ‘I am’이라면 I가 나오고, a와 m이 나오고, 한글 ‘옹’으로 치면 “‘ㅇ’나와, ‘ㅗ’ 나와, 다시 ‘ㅇ’이 나오는데 ‘ㅇ’에 해당하는 무용수가 두 번 왔다 갔다 해, 그리고 배열을 바꾸어 ‘웅’으로 해 봐, ‘엉’으로 해 봐, 아니면 ‘ㅎ’과 그 아래 ‘ㅇ’을 놓아 전혀 약속이 되지 않은 형태가 되어 봐, 그 상태로 기다린 뒤에 자음이 들어와 봐” 하는 식으로 단위화된 것을 꺼내 쓰면서 의미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빠르게 꺼내 쓸 수 있는 상태에서 무용수들은 사고의 고단함이 없고, 안무의 과정이 효율적이다. 차츰 무용수들이 음악에 대한 해석과 자의적 반응을 가미하더라도, 이미 동작을 완전히 소화했고 시각적으로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정확성을 지키려고 더 노력하는 상태에서 연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항상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한 달 전에 ‘지금 이 상태로 올라도 나는 만족할 수 있어’ 하는 단계에 도달하여 안무를 마친다. 나머지 한 달은 실패를 수용할 수 있는 시간으로 두고, 출연자들이 해 보고 싶었던 실험을 하게 한다. 무용수 자신의 해석에 의한 캐릭터 표현을 내가 작품에 용해시킬 수 있을지 판단하고 논의하는 시간이다. 이것이 내가 안무를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사진] (김윤수 안무, 2013)
김보슬: 중견 무용수가 되면 안무를 강요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윤수: 한국의 춤 사회 안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문제다. 무용수가 안무를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이쯤 춤을 춰 온 시점에서 이제는 나도 창작을 하지 않으면 안 돼’ 하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수요층이 요구하지 않는데 불필요하게 생산이 많이 된다. 춤 시장이 왜곡돼 있다.
외국은 무용 시장이라 할 만한 것이 형성돼 있고, 마케터들도 존재하고, 작품이 유통이 되고, 작품이 흥행하면 가격이 상승도 한다. 그런데 한국은 과연 그러한가. 가격은 담합돼 있고, 시장은 협소한 가운데 왜곡돼 있다. 왜 그런가. 젊은 창작자들에게 신작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일견 바람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성장촉진제를 지나치게 넣어 부양 체계에 부작용을 낳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작을 요구하는 곳은 많은데 이미 만들어진 것을 재구입해 줄 곳은 거의 없는, 심각한 구조적 결함에 처해 있다. 신작을 만들고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젊은이들에게 많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일찍 소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고 나서 또 다시 신작을 생산하려면 물리적 조건이 재정비돼야 하는데, 제작비는 여전히 저렴하다. 작품이 팔렸으면 그 팔린 금액을 가지고 좀 더 규모가 큰 작품에 도전하거나 쪼개서 다작을 하는, 당연한 번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생산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구조가 작가들을 말라 죽게 한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이 차츰 작품을 사 주는 시장에 맞추기 위해 작품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시장의 기호를 충족하는 코드를 사용하게 되고, 한국적인 코드가 특정 시장을 향한 코드로 제한된다. 젊은이들이 ‘외국인이 보면서 즐거워할 만한 한국춤’을 상상하며 출발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창작을 강요받고, 시장은 왜곡돼 있다. 내가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할 때, 어떤 기획안을 만든 적 있었다. 전국의 30여 개 공립 무용단체에서 독립 안무가의 작품을 매입하되 결코 신작을 요구하지 말 것. 그들의 기성 작품들 중 돈을 지불하고 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사 줄 것. 만들어진 작품이 실질적으로 유통되는 내수시장의 초석을 우리가 다듬어야 한다고 타 단체 감독들에게 제안했었는데, 내가 인천을 떠나면서 그 기획안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만일 연임을 했더라면 제대로 시동을 걸었을 것이다.
김보슬: 창작을 요구하려면 작품의 유통망 확장과 시장 자생력 강화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인데… 국공립 예술단체들이 점점 더 국제교류에 역점을 두는 것을 본다. 그러나 한국 시장과 함께 호흡하는 한국무용의 발전을 위해, 국내교류 또한 중요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무용 시장 생태계가 작품의 성격, 안무 방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국내 무용 시장이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면 안무가들이 우리 시장에 걸맞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더욱 다양한 안무법을 실험하고, 리서치, 분업, 협업을 펼칠 것으로 예상한다.
김윤수: 그렇다. 국립무용단 시절, 학교나 단체에 전화를 걸어 관객을 동원한다든지 하는 홍보는 그만두어 달라고 당시 감독에게 요청한 적 있었다. 불필요하거나 해서는 안 될 모객행위를 제거한 상태에서 실질적인 향유층을 점검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안무가들로 하여금 실존적인 고민을 하도록 하고, 나아가 필요한 안무를 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검 이후에 우리의 공연이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소극장으로 옮겨진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형태가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었다. (웃음)
[사진] 인터뷰 중
나는 관객도 하나의 환경으로 본다. 그래서 제자와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너희들이 춤 가지고 춤을 추니까 춤이 안 된다”고. 기존의 춤을 가지고 그들이 춤을 추니까 관객에게는 춤으로 다가가지 못 하게 된다는 말이다. 춤이 되기 이전의 것에 동시에 서서 고민한 경험을 살려 춤을 추어야, 춤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싶다. 춤 가지고 춤을 추지 말고, 춤 이전의 것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동일한 현상을 가지고도 작가마다 다양한 해석과 결과물을 만들 수 있고, 내가 올바르게 춤을 만들고 있는지 고민을 하는 자가 될 수 있으며, 무용수든 안무가든 보다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질문하지 않는 자로 남아, 사회와 관객의 고민에 우리 무용인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할 것이다. 관객이 떠나게 만드는 작가가 될 것이다. 춤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피상적 과정을 실체에 접근하는 사고로 바꿔 놓지 않는다면, 춤은 차라리 장식적 기능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 사회 문제를 같이 논의하는 척할 필요는 없다.
김보슬: 피상적 과정을 떠나 실체에 접근하려는 사고, 그리고 춤 이전의 것을 보려는 노력을 언급한 것에 깊이 공감한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리서치 결과를 수동적으로 접하는 것 말고, 직접 현장을 방문하며 보고, 듣고, 만진 것만이 진정으로 안무의 질을 높인다는 것을 이야기한 안무가가 있었다.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예술가가 손수 다루고 가공해야 할 리서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고 본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한국무용은 그 틀의 오래된 특성 때문에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안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의구심을 밝혔다. 현대화된 한국춤을 논하며 꼭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졌는데, 신무용처럼 좀 더 앞선 세대에 정립된 한국춤 영역에서는 어떤가.
김윤수: 신무용은, 언어로 예를 들면 국어사전처럼, 사전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 있는 품사, 문법을 벗어난 문장을 만들면 이미 신무용이 아닌 게 돼 버린다. 신무용이 탄생할 당시 그 춤을 만들고 배우던 사람들에게는 질문이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신무용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무대에 올려지는 춤이고, 전국의 국공립단체 공연에서 연간 100회 안팎으로 관객과 조우하는, 우리가 여전히 주목해야 할 춤이라고 생각한다. 주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수요층이 같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한국춤의 특징으로 고착된 감정 과잉은 작가가 작품의 변화의 폭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감정 과잉조차 삭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수정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춤에 없는 요소, 우리의 정서와 언어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한국적 사고, 한국적 예술에 기초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한국춤에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작자 미상의 춤 또한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현대무용으로 전향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윤수
경희대 무용학과 한국무용 전공 졸업. 1997년-2007년 국립무용단 주역무용수, 2014년-2015년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역임. 현재 김윤수 무용단 대표 및 예술감독,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장르를 넘어 한국적 컨템포러리를 추구하며 20여년 간 국내 및 국제무대에서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 <바실라>(2017 Ver.), <바실라>(2016), <네 명의 무용수를 위한 거문고 산조>(2016), <가을연꽃... (秋蓮)>(2014), (2013), <이몽(異夢)>(2012), <가야>(2009), (2008), <가벼운 바람>(2006) 등이 있으며, ‘2015년 김백봉 예술상’ 등 입상하였다.
글_ 김보슬(자유기고가/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전공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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