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 리서치’의 인터뷰 진행은 안무가에게 ‘자신의 안무 작업을 나타낼 수 있는 4가지 키워드’를 마인드맵으로 요청한 후, 직접 작성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안무가의 안무 방법론과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컨템포러리 아트와 움직임을 교차시키는 안무가 전혁진. 작은 파동마저 정돈되어 있는 그의 작품은 현대예술의 유연한 프레임 속에서 자유로이 흘러간다. 그의 안무 작업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보자.
ⓒ린
첫 번째 키워드는 “영화”
Q: 자신의 안무 작업을 나타내는 첫 번째 키워드로 “영화”를 꼽은 이유는?
A: 평소에도 영화를 좋아했지만, 무용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영화였어요. 어느 순간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작정 찍어보기도 하고 글재주가 있는 편도 아니지만 시나리오도 써봤어요. 그러다 2011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 영 아트 프런티어(AYAF)’로 선정되어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더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작은 신(scene)들이 모여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고 작품 한 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안무 작업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어요.
Q: 영화에 관심을 두면서 작품에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A: 이전에는 스펙터클한 움직임을 보여주면서도 세련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작품 안에서 감정선들도 점층적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일방적인 던져주기랄까요. 주입식으로 전달하기에 그쳤던 것 같아요. 이런 부분들이 영화를 공부하면서 다시 보이게 되었고, 안무가로서 더욱 신중하고 깊이 있는 작업을 위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작품이 조금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단단해진 느낌이 생겼어요.
Q: 최근 들어 댄스 필름과 온라인 공연 등 춤을 영상에 담아내는 다양한 시도들이 급증하고 있는데요. 영화에 대한 바탕과 영상 작업을 이어오는 안무가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A: 저도 영화를 배우면서 댄스 필름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근 10년이 되도록 만들지 못했어요. 일단 스스로가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춤과 필름의 결합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칫 잘못 가면 뮤직비디오처럼 되기도 하고요. 결국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대한 문제일 텐데요. 제가 생각하는 댄스 필름의 방향은 스토리텔링과 미니멀리즘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갈지 정한 다음, 작은 손끝 하나도 움직임처럼 느껴지게끔 만들고 싶어요.
무대 작품과 영상 작업을 모두 경험한 입장으로서 좀 더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워졌어요. 지금으로서 제 결론은 꾸준히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 계속 관심을 두고 바라보려고 해요.
<우리는 다르게 진화했다.>ⓒ옥상훈
두 번째 키워드는 “소리”
Q: 안무 작업에 중요한 요소로 “소리”를 적어주셨는데, 어떤 이유인가요?
A: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때 어떤 이미지로서의 장면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소리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에요. 아주 어렸을 때 바둑돌을 놓던 소리, 초등학교 1학년 때 버스정류장에서 들었던 소리,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들었던 지하철 소리 등등 어쩌면 사소한 소리들인데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지금도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목소리를 들으면 어디서 만났던 사람인지 금방 떠올라요.
Q: 때론 소리 그 자체가 음악이 되기도 하는데요. 작품에 녹여내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A: 한번은 귀뚜라미 소리를 작품에 사용한 적이 있는데요. 사실 제가 기억하는 소리가 귀뚜라미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명확하지 않은 그 자연의 소리가 스며오는 느낌을 작품으로 가져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작품에서는 그 소리 자체를 살릴 때도 있지만 조금 구겨서 돌린다든지 음향 효과를 더하는 편이에요. 제가 들었던 수많은 소리들 중에서 움직임이랑 융합되는 지점을 기억하고, 이를 표현해서 음악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물론 기존의 음악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하는데, 악기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흐름 위주로 보고 있어요.
Q: 소리 또한 굉장히 주관적인 기억이 될 수 있는데요. 같이 작업하는 스태프들한테 특정한 소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진 않나요?
A: 맞아요. 제가 들었던 그 소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는 거니까 보통은 샘플로 살짝 느낌만이라도 만들어서 가요. 그때 제가 느꼈던 느낌이나 감정들이 작품 속의 상황과 비슷했으면 좋겠다고 아주 열심히 설명하죠. (웃음) 물론 굉장히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최대한 그 상황이나 소리를 입체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해요. 그 다음엔 실제로 만들어 보면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수정을 거듭해요.
<동행>
세 번째 키워드는 “비우기”
Q: 안무 작업에서 ‘비우기’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A: 현재형으로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 일종의 비워내기 위한 활동이에요.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시도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데요. 처음 떠오른 시작점에서 최대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그림에 가까워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비우기’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채울 수 있는 게 없는 상태가 완성이 아니라, 더 이상 뺄 수 있는 게 없는 상태가 완성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데, 작업을 거듭할수록 더 와닿는 말이에요. 안무가로서 생각의 비움은 제일 힘들지만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Q: 평소의 리서치 과정과 방법은 어떤 스타일인가요?
A: 제 성향 자체가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해 리서치를 시작하기보다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을 저도 모르게 저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만나거나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이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가 많아요. 또한 작품을 제작하는 환경적인 영향도 있는데, 작품을 올리기로 마음먹으면 머릿속 한편은 쉬지 않고 작품을 위한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일상과 작품의 완전한 분리가 불가능한 게 일종의 제 작업 방식인 것 같아요.
평소에 추상적인 느낌 혹은 광범위한 소재(요소)들이 시작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록을 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자기 직전에 든 생각을 아침에 떠올리려 하면 정말 죽어도 안 되더라고요. (웃음) 마치 지갑을 잃어버린 것처럼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간단하게라도 메모하고 잠드는 버릇을 들였어요.
Q: 위와 같은 리서치 방법이 실제 작품으로 연결된 적이 있나요?
A: <소멸>이라는 작품을 구상할 때였는데, 굵직한 주제를 중심으로 더 작은 소재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누워 있었어요.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잠을 밀어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제 숨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숨(소리)’ 하나로 존재를 알리고 있구나. 세상에 내 존재가 없어진다는 건 이 숨이 소멸되는 거구나. 매순간 들이마시고 뱉어내고 다시 새로운 걸 마시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숨이자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소멸’이라는 주제, 삶에서 없어지는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까 ‘자위(masturbation)’가 떠올랐어요. 단순히 성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방출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쾌락을 즐기는 편안한 상태인 거죠. 제 오랜 버릇 중의 하나인 손톱을 다듬는 행위 또한 일종의 자위라고 생각해요.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양손으로 끝을 부드럽게 만들면서 느끼는 쾌감과 안정감이 있어요. 그런데 온전히 나를 위한 그 순간들조차도 결국엔 끝이 있고, 일시적으로 왔다 가버리는 허무함(empty)이 있잖아요. 이런 부분에서 떠오른 두 단어를 적고 잠들었고, 고스란히 <소멸>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졌어요.
〈Agape〉
네 번째 키워드는 “기다림”
Q: 모든 창작 과정은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만의 기다림의 과정은 어떤가요?
A: 저의 안무 작업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기다림”은 우연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라 할 수 있는데요. 직감적으로 툭 떠올라 제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찰나의 순간을 기다리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또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 혹은 나름의 표현들을 무용수들과 스태프들에게 공유하면서 반복되는 기다림도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무대가 반으로 접혔으면 좋겠어’라는 말도 안 되는 날것에 가까운 생각들을 던졌을 때, 최선을 다해 머리를 맞대주는 동료들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춤을 추고 작품을 만들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적도 많았어요. 분명히 머리에서는 그게 맞는데, 막상 펼쳐보면 아닐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경험이 없었구나. 왜 몰랐을까’하고 또 다시 기다림의 시간으로 접어들어요. 이제는 막연한 기다림에 조급하거나 불안하기보다는 우연히 찾아오는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언제나 실행에 옮길 순간을 기다리고 있어요.
Q: 2008년 창단한 그라운드 제로 프로젝트(GROUND ZERO Project)를 통해 다양한 장르 간의 협업을 지속해오고 있는데, 각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작업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A: 공동작업의 꽃은 ‘불화’라고 하듯,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더라고요. 말 그대로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욕심나는 사람들은 각자의 색이 뚜렷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 분야에서 확실한 자기만의 관(觀)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일인 만큼,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업의 방향을 조율할 수 있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배경지식과 장르 간의 이해가 우선시되어야 해요. 그게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공동작업의 의미와 재미까지 모두 얻을 수 있더라고요.
저도 다른 장르를 대하는 방식을 깨우치게 된 몇 번의 계기들이 있었는데, 그 과정들을 풀어가면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시작점부터 더욱 신중하게 임하게 되었어요. 여전히 다른 장르에 움직임을 더했을 때,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지 끝없이 고민하고 있어요.
Q: 움직임의 영역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요. 안무가로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A: 우선은 시야가 많이 넓어졌어요. 음악, 미술, 사진, 영상, 요리 등을 만나면서 점점 열린 느낌을 받는다고 할까요? 눈과 귀가 더 열리고 규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훈련이 되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안 하면 몸도 아프고 안 좋아지는 편이라, 결국은 후회는 없다는 생각으로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지만, 끝끝내 무용으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모든 활동들이 결국은 안무를 하는 과정의 일환이고, 또 예술가로 살아가는 값진 경험들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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