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에 만난 울림을 안무하다.
런던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안무가 조용민이 잠시 한국을 찾았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구석예술’이라 불리는 전각(塡刻)과 함께였다. 수많은 생각과 비워내는 마음으로 새겨진 전각을 닮은 안무가 조용민. 그의 움직임은 곧게 뻗은 신체를 축으로 지난 시간의 흔적을 켜켜이 쌓아간다. 인간 내면의 울림을 주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Hwang Paul
첫 번째 키워드는 “겨울”
Q: 자신의 안무 작업을 나타내는 키워드를 사계절로 적어주셨는데요. ‘겨울’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A: 작년 가을 2주간의 자가격리를 끝내고 15년 만에 한국의 겨울을 봤어요. 눈이 펑펑 오던 날 강아지처럼 눈을 맞으며 뛰어다니기도 했고요. 이처럼 겨울은 기억이 아닐까 싶어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고, 지난 시간에 대한 제 경험일 수도 있고요. 차가운 땅 속에 숨어있는 지난 생각들, 향기들, 기억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고 제 작업의 바탕이 되었어요. 과거의 기억은 작업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안무를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Q: 그동안 다양한 공간에서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공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나요?
A: 아무래도 건축을 전공하고 무대디자인(미술)을 배운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덕분에 일찍이 공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공간의 쓰임을 활용하는 것이 조금 다르지 않은가 합니다. 새로운 작업을 통해 만나게 되는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안의 오브제와 어떻게 교감할 것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공간 안에서 나의 움직임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을 계속하고 있어요.
두 번째 키워드는 “봄”
Q: 두 번째로 ‘봄’ 그리고 ‘순간’을 적어주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A: 봄은 땅속에서 뭉쳤던 모든 에너지가 어느 한순간에 열리는 그 순간, 찰나라고 생각해요. 작업을 시작할 때도 찰나의 순간이 있는 거 같아요. 어느 거에 딱 짚이면 그것을 놓지 않고서 그 이미지로 계속해서 끝까지 가거든요. 순간순간의 만남과 감정, 경험들을 중요시하는데 쌓였던 제 몸의 에너지를 축적하면서 나오는 그 기운들을 자양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Q: 그동안 축적해온 시간들,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인상적인 순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아무래도 처음 춤을 추면서 느꼈던 것들이 크지요. 인간의 몸으로 느껴지는 감정들, 신체 속에서 부족한 것을 찾아가는 그 과정들이 흥미로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잘 몰랐으니까 덤벼들 수 있었던 것 같고요. 밀라노 빠올로 그라시 무용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하면서 안무가라면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부터 배웠고, 또 베니스 비엔날레 장학생으로 있으면서 세계적인 안무가들의 수업을 통해 부족한 테크닉에 대한 부분도 알아가게 되었고요.
그렇게 안무라는 창작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보고 느낀 이 경험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제 그 단계는 조금 지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진짜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을 움켜쥐고 있어요. 물론 그 질문을 던질 시간은 된 것 같고요.
세 번째 키워드는 “여름”
Q: 여름은 가장 뜨겁게 타오르기도 하고, 금세 지쳐버리기도 하지요. 여름과 나란히 적어주신 ‘관계’에도 온도 차이가 있을 거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관계가 있다면요?
A: 사실 여름은 뜨거움과 지침의 그 관계들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떠올랐어요. 저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거에 대한 겁이 좀 많았어요. 그러다 2004년 무렵 화가 안토니 마리노스키(Antoni Malinowski)와 작업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때 협업의 관계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는데요. 공간과 공간을 연결시키는 지점, 다른 장르의 예술을 연결시키는 지점 등등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여러 관계들을 제 몸을 통해서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지 사고를 확장하게 된 시점이에요. 이외에도 그동안 같이 작업했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제가 스스로 찾아내고 해석해서 보여주기까지 믿고 기다려주었어요. 덕분에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예술을 존중했을 때, 저의 움직임을 비롯한 모든 작업이 진실되게 나온다는 굉장히 값진 배움을 얻었고요.
Q: 말씀하신 관계성이 다시 작업으로 들어오는 경험은요?
A: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관계는 설렘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그 대상은 주로 함께 작업하는 예술가들과 제 작업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들이고요. 다양한 예술가들과 작업하면서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벽들이 허물어지기도 하고 쌓이기도 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하고 긍정적인 자극을 받아 다른 작업으로 이어지는 거 같아요.
관객들과의 관계는 결국 제 움직임과 표현이겠지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첼리스트 마리오 브루넬로(Mario Brunello)와 즉흥에 가까운 무대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의 팽팽한 긴장감을 관객들도 알아차리더라고요. 생생한 전율을 느꼈던 무대라 기억에 남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