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원하는 백조가 아닌, 자신만의 흑조를 만들어가는 안무가 이루다.
클래식과 트렌디함을 모두 갖춘 블랙의 아름다움을 닮은 그녀의 작업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검은 발끝으로 내딛는 그녀의 과감한 도전을 주목하라.
첫 번째 키워드는 “질문”
Q: 대표를 맡고 있는 블랙토(Black Toe)는 기존의 발레가 가진 전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과감한 시도와 트렌드를 담아낸다는 평을 받는데,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A: 처음 토슈즈를 블랙으로 칠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왜 발레는 이러면 안 돼? 왜 나는 클래식발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발레는 뭐지?’하는 질문을 던졌던 것 같아요. 일단은 제가 화이트나 핑크가 안 어울린다는 걸 알고 있었고, 조금 더 트렌디하고 지금 시대에 맞는 대중적인 ‘블랙’이라는 컬러를 사용해서 나만의 발레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나를 흥분시키고 설레게 하는 새로운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여러 질문들을 계속 파고들다 보니까 저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었고, 작품의 색깔이나 성향도 뚜렸해지는 계기가 되더라고요. 여전히 발레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항심이 제 작품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저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질문들을 멈추지 않으려고 해요.
Q: 작업으로 이어지는 가장 최근에 던진 질문은 무엇인가요?
A: 지금의 환경에서 내가 무용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대에 서지 못한다면 무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떤 방식과 방향으로 컨텐츠를 확장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올해 준비 중인 신작은 제가 느꼈던 ‘외로움’의 감정인데요. 질병을 피하기 위해서 서로 거리를 두고 격리되는 모습을 보면서, 원래도 외로운 존재인 인간이 더 외로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를 이겨내고 서로 함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작품으로 준비 중이에요.
〈W〉(2020)
두 번째 키워드는 “편집”
Q: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집의 기준은?
A: 무엇보다 핵심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부수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덜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지금 시대에 맞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심플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머릿속으로 블록버스터급의 SF 영화를 구상하지만 현실은 저예산 단편영화다 보니까 어느 정도의 타협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 또한 안무가의 능력치라고 생각해요. 물론 아쉽지만 실현 가능한 지점에서 제가 발견한 것들을 재배열하고, 어느 타이밍에 어떤 장면으로 전달할 것인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제 질문이 어떻게 완성될 수 있을지 집중하려고 해요.
Q: 안무가로서의 갖고 있는 확신 또는 믿음이 있다면요?
A: 저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감정도 고귀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영감일지라도 사소하거나 하찮다고 판단하지 않고, 작품으로 발전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딱 이미지가 떠오르면 좀 흔들리진 않는 편이에요. 이게 될까?라는 질문은 안 해요. 작품에 대한 질문은 계속하지만 맞을까 틀릴까라는 질문은 좀 무시하는 편이에요. 무조건 맞아. 가야 되는 어떤 추진력은 예전에 비해 많이 생겼고, 그런 것들이 제 작품의 방향성을 잡게 해주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아요. 나로부터 시작한 작은 질문이 누군가에게 닿아 얼마나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국은 우리 모두에게 전달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있는 것 같아요.
〈W〉(2020)
세 번째 키워드는 “재해석”
Q: 지금까지도 수많은 클래식발레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요. 자신이 생각하는 재해석은 무엇인가요?
A: 안무를 시작한 초기에 제가 갖고 있었던 재해석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클래식발레를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처음에는 기존의 것을 깨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당연한 것들을 뒤집어보는 것들이 제 나름대로의 재해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조금씩 바뀌더라고요. 지금은 ‘전통과 현대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 완전히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엮어지는 작업’이 재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백조의 호수를 흑조의 시선으로 바라보겠다 하면서 <흑조의 호수>라는 작품을 했을 때, 클래식의 스토리가 지금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 기존의 흑조와 백조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나만의 서사로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클래식 작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역사를 알고 현재를 느끼고 미래를 내다봐야만 이 재해석이라는 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한테 재해석은 모든 지점을 풀어가는 그런 열쇠가 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Q: 기존의 발레 동작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창작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A: 제 모든 움직임의 베이스는 발레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모든 춤에 대한 개념까지도 사실 발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기 때문에, 몸을 바르게 세워 발레의 기본자세를 지키는 것부터 이를 어떻게 무너뜨렸다가 다시 회복하는지 이런 단순한 시도부터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기존의 클래식발레에서 고귀하게 표현되고 아름다워야만 하는 표현들을 어떻게 하면 더 직접적이고, 우리의 일상의 움직임과 닮아있는 중간지점에서 엮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요.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클래식발레 작품의 마임이라든지 스토리와 같은 단순한 흐름을 몇 차원적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에요. 어떻게 하면 그런 스토리텔링을 심플하게 압축해서 추상적이지만 조금 더 입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아요.
〈EGO〉(2020)
네 번째 키워드는 “소통”
Q: 움직임 리서치의 과정, 무용수들과의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저의 질문으로 시작된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무용수의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 안에서 충분한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들과 함께하기에 앞서 혼자서 움직임 리서치를 많이 해보는데요. 장면을 설정하고 음악을 고른 다음 직접 몸으로 움직여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더 구체화되는 것 같아요. 즉흥은 제가 던진 질문에 닿기 위한 방법이면서 동시에 무용수들과 소통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상상하는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움직여보면서 최대한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요. 직접 몸으로 시도했을 때 느껴지는 것에서 디테일이 생기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해요.
Q: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생각은요?
A: 어떤 작품이던지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때는 작품이 지닌 생명력을 잃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너무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게 웬만하면 친절하게 전달될 수 있는 방향으로 안무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이 어떻게 닿을 것인지, 과연 몇몇에게 나의 질문이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을지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글_ 서현재(에디터)
영상_ 윤구한, 김성기, 정대성
사진제공_ 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