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현장

안무리서치

오프라인 바디 스킵 - 몸, 시간의 구멍

 이번 호는 인디씬에서 음악인으로 활동해 온 임무슨이 연출한 공연 (컨셉/연출: 임무슨, 영상/퍼포먼스: 두루미와날치, 프로듀서: 신진영)을 다루는 것으로, 안무 리서치 견문을 이어가고자 한다.


 은 현실(offline)의 몸(body)이 가상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공간을 건너뛰거나(skip), 혹은 시간·공간에 의해 건너뛰어지는(skipped) 현상을 꼬집는 듯했다.


 (…) 그러나 그 느낌들은 촉촉하지 않고 건조하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감정이입할 수 있는 표정과 몸짓이 아니다. 혹은 사라진 느낌을 회복하려 하거나 구원의 서사에 놓지도 않는다. 두루미와날치는 몸의 테마에 있어서도 독특한데, 몸의 어색함 속으로 자신을 데려다 놓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연기라든가, 위대한 춤사위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메시지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두루미와날치는 자신을 찍고 나서, 화면 안의 그들을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고, 감정이나 영혼이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 영상들은 용량이나, 길이, 크기, 계층, 레이어 같은 데이터로 다뤄지거나, 밀집도, 색감, 시점 같은 시각적 직관의 영역에서 다뤄진다.
( 기획의도 중)


 연출 임무슨은 (앞 호의 제목을 빌어) ‘직업으로서의’ 안무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에 출연하고 직접 움직임을 고안한 두 명의 퍼포머 두루미와날치(정승규, 최규석) 또한 마찬가지이다. 은 춤과 춤을 떠받치는 음악을 담지 않고, 연주, 몸짓, 영상 등을 교차시킨다. 현대예술에서 무용과 무용 아닌 것의 구분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춤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번에 그렇지 않은 작품에서, 소위 다원예술 장르 속에서 드러난 춤의 궤적을 따라가 보고자 했다.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존 케이지에 의해 소리 그 자체에 관심을 보내고, 그 관심이 돌아와 다시 음악을 만들어 낸 역사가 있다. 안무도 그와 같이, 춤에 대한 관심이 몸짓으로, 몸짓에서 다시 춤으로 순환하며 재생하는 과정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안무의 중심이 안무의 여집합으로 이동하며 바깥을 경험한다. 

 



[사진 1] , 사진_ 조하나

 

 을 관람한 뒤 어느 흐린 봄날, 연출 임무슨, 퍼포먼스 그룹 두루미와날치(이하 ‘두날’)를 서울 합정동에서 만났다. 자주 직면하는 곤란함이지만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은, 가격흥정이나 자기소개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난처하다. 다른 무엇보다 예술이야말로 언어로 완전히 대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턱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나는 열쇠말을 가지고 대화에 임했다. 『암점』(박준상 저, 문학과 지성사, 2017) 제1권 「예술에서의 보이지 않는 것」 중 “불협화음” 챕터에서 가져온 키워드와 개념들은 이 글 전반에 침투해 있다. 작품의 플러그를 텍스트의 소켓에 꽂아 점등한 빛이 독자의 상상력을 희미하게나마 밝힐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글은 어느 안무가의 리서치 과정을 펼치는 문답으로 작성되지 않은 대신, 몸짓의 이면을 추적하는 관객의 리서치임을 먼저 밝힌다.


*

 

 춤이 그림이나 조각과 가장 대비되는 점은 시간을 결과물로 취한다는 점이다. 춤이나 미디어아트에서는 시간 그 자체가 미메시스의 결과로 관객의 눈앞에 펼쳐진다.


 크게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고 치자. 의식의 시간과 몸의 시간. 의식의 시간은 ‘시계의 시간’(하이데거의 표현)과 경쟁하지 않는다.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대상을 끊임없이 의식에 되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을 지금으로, 어제를 어제로 시간의 서랍들 속에 정리했다가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나 몸의 시간은 ‘시계의 시간’과 대결한다. 사정없이 몸을 관통하는 이 시간은 어떻게든 거머쥘 수도, 고정할 수도 없다. 한 번의 맥박과 한 번의 눈 깜빡임이 흘려낸 단 하나의 순간, 그것은 절대로 반복하거나 되돌릴 길이 없다. 의식이 하는 것처럼 몸은 시간을 붙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번 망막에 부딪혔던 인상(印象)을 찾아 헤매는 화가는, 또 시인은, 종이를 구기고 다시 붓을 들기를 반복한다.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마찰로 강하게 불꽃이 튄다.


 이러한 문제는 임무슨이 전작 (컨셉/음악: 임무슨, 프로듀서: 신진영)에서 제출했던 시간 인식을 떠오르게 한다.


 은 휘발하는 음악 공연이다. 블록을 쌓듯 축적하는 시간, 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유효하지 않다. 시간의 분자들은 불규칙하게 표류(drift)하고, 공간의 점들은 다음 순간 탭(tap)한다. 시간은 흐르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순간이다. 발은 딛고 있으나, 땅은 없다. 공간의 점들을 두드리고, 시간의 분자를 표류하면서, 은 휘발한다.  
( 기획의도 중)




[사진 2] , 사진_ 윤세라

 

 블록을 쌓듯 축적되지 않는 시간, 불규칙하게 표류하는 시간은 바로 몸의 시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은 전작에서의 시간 인식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 이에, 임무슨은 “고여 있는 시간”을 이야기했다.


 “두 작품이 주제의식 면에서 연속된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다. 전작이 가상·현실, 시간·공간에 관한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면, 후속작은 그것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다수가 파편화된 공간을 살고 있다.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새로운 임대주택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현실에서, 살을 부대끼는 거주의 공간이 꾸준히 나의 일부로, 나의 세계로 정착되지 않는다.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은 자본인데, 자본의 축적 자체가 요원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절된 시간을 살고 있다. 서서히 축적되어 그 다음 단계로 접근하고, 그 다음 비전으로 흡수되는 시간이 아니다. 예컨대, 인턴은 계속 인턴만, 관리직은 계속 관리직만, 박사학위를 마친 사람도 내내 공부만 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시간이 덩어리져 있고, 고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의 불연속적 시간을 말하고 싶었다.” (임무슨)


 이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시간이란 고정되고 소유될 수 없는, 그리하여 타자성으로 가득한 몸의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이끌어가는 ‘헐벗은 반복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진 3] , 사진_ 조하나

 

 “그런데 덩어리진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을 건너다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몸이다. 스킵은 몸을 통해 발생한다. 두날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도 이들이 신체 행위를 영상으로 담는 작업들을 해 온 점 때문이었다.” (임무슨)


 그에 의하면 스킵은 몸을 통해, 즉 감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한 메시지를 어떻게 퍼포먼스로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까. 은 어떤 표현 전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주제를 보이는 몸짓으로 드러냈는가. 이야기는 ‘두날’에게서 이어졌다.


*


 “때로는 연출의 요청 먼저, 때로는 안무 먼저 이루어졌고, 그 방향들이 섞이고, 그러다가 양방향 동시에 작업이 되기도 했다. 연출과 우리 사이에 주문과 납품이 오가는 과정 같은 게 아니었다. 시간을 거쳐 어떤 대상을 새로운 결과로 도출하는 것을 간략히 ‘재현’이라고 부른다면, 시간의 앞뒤에 원대상과 결과물이 순서대로 놓인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안무는 거기에 거꾸로 진입할 때가 많다. 말하자면, 먼저 몸짓을 기호화하고 그것이 무엇을 지시할 수 있는가를 역추적하는 것이다. 몸짓의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우리 각자의 퍼포먼스가 섞이고 교차하면서, 그런 것들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지시할 수 있는 대상과 영역이 확장된다. 한 가지가 아니라 어떤 입체적인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그렇게 기호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안무가 나왔다.” (정승규)


 “나는 이라는 제목에서 스킵이 강조되어야 함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작을 모사하는 것은 지양하자는 데에 뜻을 모았다. 우리가 그런 걸 잘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제일 쉽게 스킵을 경험하는 때는 언제인지를 살펴보니, 인터넷 동영상 따위를 앞뒤로 감거나 화면을 건너뛰면서 공허감, 휘발감을 만들어내는 때였다. 가장 일상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설사 즉흥적이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것을 가장 가깝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일부러 멋있는 장면을 연출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합의에 부합하는 모티프였다. 동작 자체로 지시대상을 가리킨다기보다, 동작에 수반되는 표정이나 분위기를 통해 의미가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최대한 일상적인, '표준 설정' 모드와 같은 표정과 모습이 가장 스킵을 가장 잘 드러낼 것이었다. 가장 일상적인 시간, 공간들을 스킵하고 있으니까.” (최규석)


 Offline Body Skip을 상상할 수 있는 한 장면. 두루미와날치의 영상 <슬로우 스노우>는 웹의 이미지 / 블리자드 뉴스를 배경으로 그들이 웃는 영상이다. 그들은 초반부에 눈을 가리며 방황하다가, 맑은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웃기 시작한다. 곧 가짜 눈 세상과 블리자드 뉴스가 겹쳐지면서, 화면 속 인물은 2초간 멈췄다가 다시 웃는다. 숌부르크사슴은 여기에 를 연주한다. 실험에 끌려온 원숭이가 창백해지고, 신음 내는 것을 상상하며 연주한다. 화면 속의 인물이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그들의 웃음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온 억지웃음이기 때문이다.
( 기획의도 중)


 “우리가 안무에 대한 흥미를 가지기는 하지만, 안무가들 입장에서의 그것과는 다를 것 같다. 무용수의 동작에는 당위성이 있다고 본다. 또 그게 무용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상성에 초점을 맞춘다. 지극히 현실적인 동작들을 하면서, 감정 전달의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대상으로만, 오브제로만 보이기를 의도한다. 동작을 피상적으로 하고, 영상으로 촬영된 스스로를 피상적으로 바라본다. 제일 일상적인 동작들이 가장 피상적이더라.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움직임들은 안무라기보다 기호에 가깝다고 보고 있으며, 그 기호들이 라이브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 영상을 통해 보여짐으로써 여느 매체에 전시되는 사진과 다를 바 없다고도 생각한다.” (정승규)


*


 그러한 인식 안에서 신체를 대하는 것이 바로 몸을 스킵하는 것에 다름 아닐까. 물론 작품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밀어붙인다. 단절된 공간들, 쌓이지 못하는 시간들을 흘려보내는 구멍으로만 전락한 몸에는 감각과 감성이 약화되어 간다. 한 순간, 한 옆자리와 생생하게 접속하는 몸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계와 같은 무심함으로 스킵하는 몸이다. 몸을 통해서 스킵이 발생하는 이유다. 두날이 직접 퍼포머로 출연하는 그간의 영상작업들에서,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유행하는 합성 사진처럼 어딘지 어색한 느낌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넌지시 인터넷 공간을 가리키고 있으며, 내가 보는 것이 분명히 가상의 조합물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오프라인 공간을 가리키고 있는데, 합성 이미지 같은 것들 사이로 생동하는 것은 퍼포머들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로부터 유리되고 고립돼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몸이기도 하다.


 그런 몸들이 춤추는 에서 안무 바깥의 안무 실험을 보았다.



 

[사진 4] , 사진_ 조하



 

[사진 5] , 사진_ 조하나




 

[영상 1]  영상 포스터




[영상 2] 두루미와날치 퍼포먼스 영상



임무슨
'느낌’에 대해 집중하다보면, 그 느낌은 언제나 하나가 아니다. 사람은 행복한 가운데에서도 불안함을 느끼고, 쓸쓸한 가운데에서 편안하기도 하다. 이처럼 단 하나의 말로 번역할 수 없는 몸의 느낌을 음악으로 만든다. 

 


두루미와날치
두루미와날치(정승규, 최규석)는 2012년 결성하여 활동 중인 미술 듀오이다. 
두루미와날치는 가상과 현실, 상황과 일상 등에서 신체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가 어떻게 결합되고 발화되는지에 대한 언어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글_ 김보슬(자유기고가, 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학 MFA)